빵집에 가면 종종 초코 크림이 든 소라 모양의 빵을 고른다. 어린 시절 먹어본 적이 별로 없어 그때의 결핍을 인제야 채우는 것이다. 그렇게 골라든 소라 빵을 먹을 때면 십여년 전의 어느 여름밤이 떠오른다.
“보통씨, 외국어 할 줄 알아요?” 공연기획사에 근무하던 지인이 전화를 걸어와 물었다.
“대충 7개 국어 할 줄 압니다.” 물론 거짓말이다. 7개 국어로 욕을 알아들을 수 있을 뿐인데, 그냥 저 말이 튀어나왔다. 설마 믿을까 싶었다.
“잘됐네. 지금 밴을 보내줄 테니, 인천공항으로 가세요.”
한국에서 공연을 위해 미국과 유럽 출신의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오는데 며칠간 따라다니며 통역을 하라는 것이었다. “네”라고 답한 뒤 옷을 갈아입고 도착한 밴을 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뭐, 어떻게 되겠지’하는 마음이었다.
통역은 대단찮았다. 직원이 내게 오케스트라의 스케줄을 알려주면, 한국어로 오케스트라 단원에게 전달했다. 천만다행으로 교포 출신 단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단원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많은 나라에 공연하러 다녀봤지만 너처럼 영어 못하는 통역은 처음이다.” 그것과 별개로 단원들과 사이가 좋았다. 매일 밤 술을 마시며 놀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사정을 공연기획사 쪽에서는 눈치 채지 못했다. 일정이 어긋나는 일이 없었고, 단원들의 만족도도 높았으니까. 그래서일까, 기획사 대표는 공연이 끝난 뒤 열흘 정도 추가로 일 해줄 것을 원했다. 단원들을 데리고 어딘가의 리조트를 빌려 진행하는 행사에서도 통역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술이나 마시고 한국어만 떠들면 되니 놀면서 돈 버는 셈이었다.
행사는 음악 전공 학생들을 상대로 진행되는 마스터 클래스라는 것이었다. 참가 학생들은 여유로운 집안 출신 같았다. 참가비만도 수백만원이었고, 학생들이 가지고 온 악기의 가격이 천만원 단위는 기본이었다. “엄마가 여기 와야 5천만원짜리 바이올린 사준대서” 참가한 학생도 있었다. 일은 별 게 없었다. 유학파 출신 학생 몇이 통역으로 투입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주로 학생들을 찾아다니며 일정에 맞춰 수업에 넣어주고, 밤마다 단원들과 술을 마시기만 하면 됐다.
그런 어느 날, 새로운 임무가 주어졌다. 다음 행사 대상자들에게 전화로 참가 여부를 묻는 것이었다. 그 행사는 저소득층을 상대로 진행되는데, 재능은 있으나 경제적 여건 때문에 중도 포기한 학생들이 대상이었다. 명단을 받아든 나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무료로 유명 음악가의 강의를 들을 수 있다는 소식을 전하면 얼마나 기뻐할까 하는 생각에서다.
“우리 애는 이제 피아노 안 쳐요.” 수화기 너머로 지친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이건 정말 좋은 기회예요. 돈도 안 들고.“ 연유를 알 수 없어 다급히 말하는 나의 말을 자르고 할머니가 말했다. “얘가 엄마 아빠가 없어 당장 먹고 살기도 힘든데 피아노는 무슨 피아노.”
적지 않은 수의 대상자(정확히는 그들의 보호자)는 단호하게 참여를 거부했다. 아직 명단엔 많은 사람이 남아있었지만, 쉽사리 수화기를 들지 못했다. 여름이라 더웠고, 스키장으로 이용되던 리조트라 에어컨이 없었다. 땀이 턱 끝에 맺혔다. 똑 똑 떨어졌다. 지금 이곳엔 수백만원의 참가비를 내고 수천만원짜리 악기를 들고 와 하루 한 시간 남짓의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 있었다. 수화기 너머엔 재능이 있음에도 헛된 희망을 심어주지 않으려는 보호자를 가진 학생들이 있었다. 뚝뚝. 턱 끝에 맺힌 땀이 아니, 눈물이 떨어졌다. 나는 질질 울며 계속해서 전화를 걸었다. 걸고 또 걸며 바라고 바랐지만 참여자는 몇 되지 않았다. 그마저도 마지못해 수락했다. 기쁜 목소리는 듣지 못했다.
초코 소라 빵을 먹노라면, 만드는 법을 배워 무진장 싸 들고 다니며 아이들에게 나눠주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어른이 되고서야 결핍을 충족하게 될 아이를 한명이라도 줄이고, 창밖에 선 채 초코 소라 빵을 바라보기만 했던 과거의 나를 위로하고 싶어서.
글·그림 김보통 만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