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 긴 여름이 지나가는 모양이다.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고 하늘빛은 더욱 깊어졌다.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 떠오르는 음식과 식당은 많지만, 역시 이런 날씨에는 제철 해산물을 먹는 것이 중요하다. 노량진수산시장이나 가락시장처럼 신선한 해산물을 바로 먹을 수 있는 곳도 좋지만 시장의 북적거림이 부담스러울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늘 중구 필동의 ‘필동해물’로 향한다.
먹고 마시는 것을 ‘애정’하는 이에게 있어서 필동해물은 보석 같은 존재다. 술꾼의 성지이자 ‘배부르지 않은’ 해산물 안주의 대명사다.
바람이 선선히 부는 날에 충무로 지하철역에서 내려 슬슬 걷는다. 좋아하는 노래 서너 곡을 들으며 대한극장 앞을 지나 동국대 쪽 언덕길로 오르면 그의 끝자락에 필동 해물이 있다. 그 옛날 선술집 간판이 그대로 달린 외양부터 반갑다. 일부러 낡은 간판을 단 채, ‘레트로(복고풍)’를 추구하는 요즘의 ‘힙 한’ 식당들과는 때깔부터 다르다. 원조는 원조라는 강한 믿음이 간판에서부터 느껴진다.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면 작은 테이블 3~4개가 놓인 단출한 내부가 보인다. 앉자마자 스테인리스 그릇에 한가득 담긴 홍합탕이 나온다. 자동으로 “여기 소주 하나 주세요”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다. 이 집에서 먹을 수 있는 유일한 따뜻한 안주이자 기본 찬이다. 멍게, 해삼, 개불 등 각종 해산물을 단품으로 시켜도 좋지만 이곳의 명물은 누가 뭐래도 ‘모둠’이다. 조개, 삶은 굴, 소라, 멍게 등 기본적인 해산물에 한치나 오징어와 같은 제철 해산물이 곁들여지는 식이다. 지금 제철 해산물은 가을날의 귀염둥이, 전어다. 작은 크기의 전어가 모양 그대로 동그랗게 뼈 채로 썰어 나온다. 푸짐한 미나리 위에 다양한 해산물들이 줄지어 누워있는 모양새에 마음이 뿌듯해진다. 미나리 한 움큼에 전어, 아삭한 고추를 얹고 이곳만의 특별한 레시피로 만든 초장에 찍어 먹으면 완벽한 가을의 시작이다. 얼음처럼 차가운 소주를 훌훌 털어 넣고 젓가락은 굴로, 멍게로, 소라로 향한다.
부담스럽지 않지만 풍성한 한 접시의 해산물을 벗 삼아 정다운 친구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찬바람은 누그러지고 마음에는 따뜻함만이 남는다. 이곳에 해물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올여름을 시원하게 보낼 수 있게 해준 필동면옥부터 ‘2차’를 하기에 딱 좋은 꼬치 전문점 ‘필동분식’까지 이 지역엔 먹거리가 넘쳐난다. 날이 좋아서, 사람은 더욱 좋아서 오늘도 비틀거리며 ‘필동 트라이앵글’을 헤맨다.
백문영(라이프스타일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