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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먹으면 먹을수록, 이런, 몽블랑 같은 것

등록 2018-08-31 09:40수정 2018-08-31 09:55

보통의 디저트
그림 김보통
그림 김보통

작가로 불린지 6년. 부지런히 살았다. 내 이름을 달고 나온 책이 열두 권. 매년 두 권의 책을 만들어온 셈이다. 이런 나를 두고 ‘회사원처럼 일한다’는 사람도 있었다. 맞는 말이다. 나는 매일 매일, 쉼 없이, 되든 되지 않든, 꾸역꾸역 쓰고 그렸다. 설령 쓰고 싶은 마음이 없어도, 그리고 싶은 마음이 없어도. 회사원이 업무를 하듯, 마감을 쳐냈다

“창작욕은 없어요”라고 어느 인터뷰 때 말했다. “회사로 출근해 일하듯, 작업실에 앉아 일할 뿐입니다.” 건방진 소리지만 대단한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바람은 없다. 그럴 깜냥도 안 된다. 나는 그저, 낙엽을 치우고 잡초를 뽑듯 감흥 없이 일하며 살아왔다. 창작하는 사람으로서 바람직하다고 말할 순 없겠지만, 이런 느슨한 태도로 임했기에 지금까지 버틸 수 있는 건 아닐까 싶다.

대수롭지 않은 글을 쓴다. 별 것 없는 그림을 그린다. 모두가 열심히 살아갈 것을 강조하는 이 사회에선 하등 도움이 안 되는 인간이고, 결과물이다. 운이 좋아 여태껏 먹고 살고는 있지만 무언가 위대한 것을 이루지는 못할 것이다. 머지않은 미래에 사라지는 것은 물론, 당장에라도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은 많다. 참 무상하다. 새삼 허탈한 마음이 들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잠시 내려놓고 한적한 공원으로 향했다.

무더위는 지나갔지만, 볕은 아직 따가웠다. 무턱대고 모래밭에 앉았다. 얼마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조금 떨어진 곳에선 아이들이 모래 놀이를 하고 있었다. 수돗가에서 물을 받아와 모래에 버무려 성을 쌓고, 댐을 만드는 중이었다. 부질없는 짓이다.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하지만 아이들은 매우 열중하고 있었으며 즐거워 보였다. 누군가 “그런 무의미한 일을 잘도 하는구나”라고 말해봤자 귓등으로도 듣지 않을 것이다. 그 누군가가 내게 다가와 “그런 무의미한 글을 잘도 쓰는구나”라고 한다면 나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뭐라 답할 수 있을까.

공원을 벗어나니 카페가 있었다. 들어가 커피를 주문하는데 진열장에 놓인 밤 모양의 케이크가 보였다. “이건 뭐죠?”라고 물으니 “몽블랑 같은 겁니다”라고 해서 하나 시켰다. 조반니 플라티나라는 이탈리아 요리사가 알프스산맥의 최고봉인 몽블랑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었다는 이 디저트는 밤으로 만든 마론 크림에 머랭과 상티이 크림을 올려 원뿔 모양으로 만든 뒤, 하얀 슈거 파우더를 뿌려 눈이 덮인 몽블랑 정상의 모습을 표현하는 것이 특징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파는 몽블랑은 모양도, 색도 몽블랑과는 전혀 연관이 없어 보였다. 이래서야 몽블랑이라고 부를 수도 없겠구나 싶었는데, 이름 역시 조금 달랐다. 그래서 몽블랑 같은 것인가 보다.

몽블랑 같은 케이크와 커피가 든 쟁반을 들고 테라스 좌석에 앉았다. 공원엔 아까의 아이들은 사라지고 초등학생쯤 돼 보이는 아이들 셋이 야구를 하고 있었다. 인원이 부족해 한 명이 던지고, 한 명은 받고, 다른 한 명은 칠 뿐이라 야구라고 할 수도 없었다. 역시 부질없다. 하지만 그런 건 신경 쓰지 않겠지. 포크를 들어 몽블랑 같은 케이크를 한입 잘라 입에 넣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정말 몽블랑 같은 맛이었기 때문이다. 이럴 거면 뭣 하러 그렇게 애를 써 모양을 바꾸고, 이름도 달리했는가 싶을 정도로 몽블랑 같았다.

아무렴 어떠냐 싶었다. 모래로 성을 쌓건, 셋이서 야구를 하건, 애써 몽블랑 같은 것을 만들건, 더 이상 무언가를 이루지 못하는 글을 쓰 건. 아무렴 어떠냐. 문득 홀가분해졌다. 되고자 하는 것이 없으니 뭐가 되든 상관없다. 주어진 기회에 충실하며 묵묵히 살아낼 뿐이다. 만드는 것마다 변변치 않지만, 꾸준히 한다면 그럭저럭 봐줄 만한 걸 만들어 낼 수도 있겠지. 그리고 언젠가 모든 것이 끝나고 긴 잠이 드는 날, “그런 무의미한 삶을 잘도 살았구나”하고 누군가 말한다면 “하지만 즐거웠지”하고 웃으며 답할 것이다.

글·그림 김보통(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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