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시대의 서울만큼 변화무쌍하고 다양한 면모를 가진 도시가 또 있을까? 젊고 가난한 예술가의 도시 베를린에서도, 전 세계 유행의 선두주자라는 뉴욕에서도, 동북아시아의 허브이자 미식의 도시인 홍콩에서도, 서울이 내뿜는 활력과 당당함을 느낄 수 없었다면 과장일까? 서울 중구 을지로동이야말로 이 변화와 활력의 중심에 서 있는 동네다. 공구 상가와 인쇄 골목, 낡아 지저분해 보이기까지 하는 이 동네에 요즘 젊은이들은 열광한다. ‘만선 호프’로 대표되는 노가리 골목, 매콤하고 자극적인 골뱅이가 매력적인 골뱅이 거리, 이도 저도 아닐 때 찾는 삼겹살과 감자탕집이 있는 ‘아저씨 스트리트’까지 을지로의 매력은 한도 끝도 없다. 하지만 요즘 젊은이들이 원하는 것은 더 새로운 것, 더 세련된 곳이다.
을지로 노가리 골목에는 노가리와 생맥주를 파는 호프집이 당연히 즐비하다. 그 누구도 이 거리의 흥겨운 분위기에 휩싸여 고개를 들어 위를 볼 생각은 안 한다. 호프집들이 위치한 빌딩은 낡았다. 그 빌딩 3층에 ‘서울라이트’가 있다. ‘뉴요커’, ‘런더너’, ‘베를라이너’처럼 ‘서울에 사는 사람’을 뜻하는 단어가 새삼 반갑고 새롭다.
을지로에 새로 생긴 대부분 카페와 식당은 계단을 오르다 ‘이런 곳에 도대체 뭐가 있나’ 싶은 생각이 들 때쯤 나타난다. 낮에 방문해도, 저녁에 방문해도 귀신이 나올 듯 음침하고 음험한 건물에 있다. 그래서 ‘돌아갈까’하고 포기할 때쯤 은은한 라운지 음악이 들리고, 문틈으로 보라색 빛이 삐져나온다. 반갑다. 간판은 당연히 없다. 필기체로 표기한 ‘Seoulite’가 적힌 종이만 덜렁 붙어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생각보다 아담하고 예상보다 편안한 공간이 나타난다. 창문에는 보랏빛 셀로판종이를 붙여 놓아 빛이 비칠 때마다 은은한 보라색이 공간을 채운다. 천장에는 낡은 침대 스프링을 활용해 만든 조명을 달아 놓았다. ‘이렇게도 공간을 채우고 꾸밀 수 있구나’하고 감탄을 자아내는 감각적인 인테리어를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이곳은 기본적으로 카페다. 서울 마포구의 유명한 카페 ‘프릳츠 커피 컴퍼니’의 원두를 사용해 만드는 핸드 드립 커피와 카페오레가 대표 메뉴. 알록달록한 색으로 시선을 사로잡는 딸기 라떼와 믹스 베리에이드도 인기 메뉴다. 하지만 을지로의 목적은 그저 커피를 마시는 데에만 있지 않다는 것을 알코올 마니아들은 안다. 대낮에도 부담 없이 마실 수 있는 잔 와인부터 ‘믹스베리 소주 칵테일’까지. 음주를 즐기지 않는 이도, 애주가도 모두 만족할 만한 구색이다.
새로운 공간을 발견하는 것은 늘 즐겁다. 그곳이 낡은 을지로의 한복판,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자리일 때 즐거움은 배가 된다. 지금, 이 순간, 서울은 가장 혈기왕성하고 제일 새롭다.
백문영(라이프스타일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