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살 무렵. 2주에 한번 성분헌혈을 했다.
일반적으로 하는 전혈헌혈은 2개월마다 할 수 있지만, 혈액의 일부 성분만을 채혈하는 성분헌혈은 2주마다 할 수 있어 한 달에 두 번씩 헌혈의 집에 들렀다. 이유는 몽쉘통통을 배터지게 먹기 위해서였다. 우스운 일이다. 믿기지 않을 정도다.
단골집도 있었는데 사당역에 있는 이동식 헌혈의 집이었다. 간호사가 두 명으로 한명은 고참이고 한명은 후배인 느낌이었다. “학생, 또 왔네요”라고 고참 간호사가 알아보고 인사해주면 부끄러우면서도 우쭐했다. 사회에 이바지하는 느낌이었다. 실상은 몽쉘통통을 먹기 위해 오는 것이라 <허삼관 매혈기>의 허삼관 꼴이었지만 그랬다.
피를 뽑는 것은 후배 쪽이었다. 이쪽도 나를 알고 있어 “성분 하실 거죠?”하고 물어오면, “네”하고 답했다. 단골 바에 들른 오래된 손님과 바텐더의 대화 같았다. 단골 바는커녕 바에 가본 적도 없던 때지만 혼자 그렇게 느꼈다는 얘기다. 나 말고 손님이 없는 날은 짧게나마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말을 꺼내는 것은 늘 고참 간호사였다.
“여자친구 있어요?” “없는데요...” “아니 왜 여자친구가 없어.” “재수생이라…” “재수생이면 연애 안 하나.” “아니, 못하는 거라…” “대학 가면 연애해요.” “하고는 싶지만…” 같은, 아무 쪽에도 쓸모없는 대화를 하며 피를 뽑았다. 전혈에 비해 시간이 오래 걸리는 성분헌혈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골수기증은 안 하세요?” 처음으로 후배 간호사가 물었다. 백혈병이나 혈우병, 재생불량성빈혈 같은 병으로 골수조혈세포가 제 기능을 못하는 환자에게 건강한 골수를 기증하라는 것이었다. “헌혈 많이 하시니까. 이것도 하세요”라고 간호사는 말했다. 문득 연말연시에 티브이(TV)에서 골수기증 다큐멘터리를 봤던 게 떠올랐다. 빨대만 한 주사기를 골반인지 허리인지에 꽂아 생 골수를 뽑아내는데, 기증자가 몹시 괴로워하던 장면이 충격적이었다. “그거 아픈 거 아닌가요?”라고 주저하며 되물으니 “하지만 사람을 살릴 수 있어요”라고 간호사가 답했다.
말했듯 골수기증은 직접 골수를 추출하느라 ‘아플까 봐’라는 이유로 망설이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기증 서약을 하고 피기증자와 연결이 되더라도 최종적으로 기증을 거부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그 정도로 두려움도 부담도 크던 일이었다. 당시 나는 수능을 망치고, 버스를 타고 두 시간을 달려야 갈 수 있는 대학에 며칠 다니다 말고 재수를 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직 새파랗게 젊어 많은 기회가 있는 때지만, 그때는 자존감이 떨어질 대로 떨어져 ‘이미 망한 인생’이라는 확신을 하고 있었다. 좋은 대학을 못 갔으니 좋은 회사도 못 갈 것이고, 당연히 제대로 살 리가 없을 것만 같았다. 꾸준히 헌혈을 했던 것은 어차피 망한 인생, 피라도 의미 있게 쓰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없지 않았다. 그런 내가 사람을 살릴 수 있다니. 남은 인생에서 내가 어떤 노력을 해, 무언가를 이룬다 한들 그 이상의 의미 있는 일은 아마 못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렇다면 답은 정해져 있다.
“할게요.” 나는 비장하게 말했다. 마침 헌혈도 끝이 났다. 이내 고참 간호사가 골수기증서약서를 들고 와 내밀었다. “어차피 신청해도 기증받을 사람이랑 체질이 맞아야 하는 거라, 죽을 때까지 연락이 오지 않을 수도 있어요.” 나를 안심시키기 위한 것인지 선배 간호사는 말했다. “저는 꼭 연락이 오면 좋겠는데요”라고 내가 답했다. 몽쉘통통을 2개째 입에 넣은 참이었다.
그것이 벌써 17, 18년 전의 일이다. 골수기증은 더는 직접 뽑아내지 않고, 성분 헌혈하듯 조혈모세포만을 채취한다. 당연히 고통스럽지도 않다. 그런데도 이전의 인식 때문인지 기증자는 많이 늘지 않았다고 한다. 매년 조혈모세포 기증에 성공하는 사례는 450건이지만 기증 거부 사례는 1400건이라고 한다. 나는 오늘도 연락을 기다리고 있다. 몽쉘통통을 먹으면서.
김보통/만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