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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팥빙수 앞에서 바라던 소원, ‘회사가 망했으면’

등록 2018-08-01 20:10수정 2018-08-01 20:16

[ESC] 보통의 디저트

회사에 다니던 때의 어느 여름날이다. 근무하던 사무실에서 큰길을 건너 위치한 작은 카페의 한구석에 앉아 팥빙수를 앞에 두고 ‘회사가 망하면 좋을 텐데’하고 바라고 또 바랬다.

이 차장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부장 바로 밑에서 부서 업무 전반을 담당하는 호랑이 밑에 여우 포지션이다. 부장은 정년퇴직을 앞둔 이빨 빠진 호랑이라, 혼자 뻐끔뻐끔 담배만 태워댈 뿐 직접 지시를 하는 일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여우가 기고만장했다. 출근하는 시각부터 퇴근할 때까지 모든 일을 자신에게 보고하게 시켰고, 틈날 때면 자신도 부서원들의 업무를 일일이 확인했다. 좋게 보면 책임에 충실한 것이지만, 속내는 음흉하기 짝이 없었다.

“내년에 부장 밀려나면 나밖에 부장 할 사람이 없어!” 매일 같이 술을 마시던 이 차장은 그날도 술에 취해 말했다. 눈은 풀려 있었고, 입에선 연신 침이 흘러 나왔다. 벌써 부장이 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나는 올해 어떻게든 우리 부서를 최고로 만들 거란 말이야!” 이 부장은, 아니 이 차장은 주임 나부랭이일 뿐인 내게 소리쳤다. 아무래도 좋았다. 부장이 밀려나도 상관없고, 이 차장이 부장이 돼도 상관없다. 그가 부장이 되어 맡게 될 부서에 나만 없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이번 달 얼마 그릴 거냐?” 이 차장이 물었다. 나는 영업부서에 속해 있었는데, 실적을 자신의 돈으로 채우는 ‘그리기’라는 것이 횡행했다. 우리 회사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 주변의 친구 중 은행, 카드, 증권이나 보험 같은 이른바 금융권에 다니는 경우는 적게나마 그리고들 있었다. 그는 내게 그릴 것을 종용했다.

“안 그릴 건데요.” 나는 입사 삼 년이 넘은 상태에서도 그린 적이 없었다. 실적이 목표에 미달하면 미달하고 말았다. 그런다고 목표가 줄어들진 않았다. 반면 운이 좋아 달성하면 다음 달엔 반드시 목표가 늘어났다. 아킬레우스와 거북이의 역설이 떠오르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더더욱 그릴 수 없었다. 그래 봤자 다음 달에 더 그려야 할 뿐이니까.

“집에 돈 없냐?” 이 차장은 다시 물었다. “없는데요.” 나는 답했다. “아버지 뭐하시는데?” “암에 걸리셔서 요양 중이신데요.” “어머니는?” “병간호하시는데요.” 단호한 대답에 이 차장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거지새끼냐?” 할 말이 없었다. 드릴 말씀이 없는 게 아니라, 더는 이 사람과 말을 나누고 싶지가 않았다. 자리를 뜨지도 못했다. 그가 내 머리채를 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내 머리를 흔들며 “어휴. 이 거지 새끼. 목표 달성도 못하는 게 돈도 없고”라고 말하며 연신 한숨을 쉬었다. 이상한 일이다. 이런 사람이 회사를 다니고 사회생활을 한다. 심지어 일 잘하는 직원으로 평가받고, 인정받았다. 그리고 나는 무능력한 직원이었다. 누가 이상한 것일까. 무엇이 정상인 것일까.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어쩔 수 있는 게 없었다. 나는 잠자코 머리채를 잡힌 채 앉아있기만 했다. 그는 한참을 더 중얼거리다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나는 직원을 불러 조용히 “양주 한 병 더 주세요”하고 말한 뒤 살그머니 가게를 나왔다. “계산은 저분이 하실 겁니다”라고 말하는 동안에도 그는 고개를 흔들며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다음 날, 이 차장은 별말이 없었다. 언제나처럼 붉게 충혈된 눈으로 노려볼 뿐이었다. 술값은 아마 법인카드로 냈겠지. 어쩌면 자신이 주문한 것이라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제의 대화는 잊지 않은 것 같았다. 나의 실적은 그대로고, 그릴 낌새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식사 다녀오겠습니다.” 점심시간이 되어 부서를 나서며 말했다. 그동안에도 이 차장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소심한 복수는 했지만 뒷감당까진 버거웠다. 좀체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그것이 내가 그날 숨어서 팥빙수를 먹은 이유다. 당연히 회사는 망하지 않았고, 나만 그만뒀다.

김보통(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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