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하고 뜨거운 날씨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바로 옆에 서 있는 사람과 어깨만 부딪쳐도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친다. 인류애는 뭐고, 아가페가 다 뭐란 말인가? 그냥 지금은 ‘찬물에 지구를 한번 헹궜으면 좋겠다’는 허무맹랑하고 절박한 생각만 든다. 이런 날씨에는 입안으로 음식을 밀어 넣는 것조차 귀찮다. 부른 배를 부여잡고 있는 것도 버겁다.
서울 을지로로 향할 때까지만 해도 별 기대는 없었다. ‘그래 봤자 노가리 뜯으며 맥주나 마시겠지. 이 날씨에는 불 앞의 감자탕도, 삼겹살도 다 싫다’는 생각뿐이었다. 노가리 골목으로 들어서려던 찰나, “그쪽이 아니다”라는 친구의 만류가 들려왔다. 도대체 어디를 가겠다는 말인가. 짜증 반, 체념 반인 마음으로 친구의 뒤를 쫓아갔다.
지하철 을지로3가역 11번 출구 방향으로 걸으면 ‘골뱅이 골목’으로 칭하는 좁은 길을 만난다. 이 길을 지나면 인쇄소, 간판 제조업체와 공업사 등이 모여 있는 다소 음침한 골목이 나온다. 자동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까 말까 하는 좁은 너비다.
어두운 골목을 3분 정도 걸었을까, ‘빠우(금속이나 돌 표면을 윤기 나게 하는 기계나 작업)’라는 글자를 간판으로 내건 가게 바로 옆에서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는 ‘레드 스타’를 발견했다.
육중한 스틸 문을 열고 들어서면 단단한 나무로 만든 바(bar) 테이블과 그 뒤로 셰프의 바쁜 몸짓까지 한꺼번에 보였다. 바에 자리를 잡고 앉아 더위를 식혔다.
‘대구 바칼라와 구운 바게트’, ‘일본식 닭다리와 정육 비장탄 구이’ 등의 요리가 눈에 먼저 들어왔지만 그날은 간단히 먹기로 한 터였다. ‘오늘 제일 좋은 재료로 만들었다’는 뜻의 ‘오늘의 메뉴’를 살폈다. ‘제주 고등어 초회’, ‘돌문어 구이’, ‘생소시지와 초리조’ 등 배부르지 않으면서도 입맛을 돋우는 음식이 한가득했다. 제주 고등어 초회를 주문하고 ‘우롱 하이볼’을 곁들였다. 투명한 유리잔에 얼음을 동동 띄운 채로 등장한 우롱 하이볼은 우롱차에 일본 소주를 섞은 칵테일이다. 일본 소주의 구수한 첫맛에 이어 깔끔한 우롱차의 맛이 뒤를 이었다. 식초에 절인 고등어를 숙성시킨 고등어 초회에 고추냉이를 얹어 먹고 하이볼을 홀짝였다. 그다음 술은 무엇을 고를까, 고민하는 재미도 있었다. 소주부터 위스키, 생맥주와 칵테일, 각종 와인까지 술이란 술은 모두 이곳에서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공간의 분위기를 정겹게 채우는 데는 음악도 한몫 거들었다. 1980년대 일본 가요부터 재즈, 흘러간 팝과 가수 유재하의 노래까지. 모두 비슷하지만 다른 정서의 따뜻한 음악. 그리고 작고 아늑한 공간에서 만들어지는 특유의 공기가 무척 정겨웠다.
누구랑 와도, 언제 와도 좋은 술집이다. 어두운 하늘에 별이 뜬 듯, 밝고 영롱하기까지 한 시간을 보내고 나니 더위도, 짜증도 가셨다.
백문영(라이프스타일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