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리아에서 일본인 호스텔에 보름 정도 머무른 적이 있었다. 숙소를 잡지 않은 상태로 도착해 버스터미널에서 보이는 동양인을 무작정 따라 갔는데, 알고 보니 일본인이었고 호스텔 역시 일본인들만 머무르는 곳이었다. 불가리아 대학생이 아르바이트하고 있었는데, 당연히 일본어를 잘했다. 전체 수용 인원 열 명 남짓인 작은 호스텔에 홀로 외국인이 된 기분이었다. 실제로 외국이고, 외국인이었지만.
하필이면 장마라 연일 비가 내리거나 우박이 내렸다. 워낙에 매섭게 내리다 보니 섣불리 숙소를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종일토록 모두가 거실 소파에 앉아 잡담만 할 뿐이었다. 혼자 침대에 누워있기도 뭐해 나도 그사이에 엉거주춤 끼었고, 어느 순간 같이 잡담을 나누게 되었다. 며칠이 지나고부터인지는 모르겠다. 정신을 차려보니 일본어로 말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뭐 기적적으로 귀가 열리고 말문이 열렸던 것은 아니고, "그래?", "정말?", "진짜?", "아닌 것 같은데…", "굉장해" 같은 추임새만 주워듣고 앵무새처럼 따라 할 뿐이었다. 하지만 의사소통이란 생각보다 언어가 차지하는 비중이 적은 것인지, 맞장구만 신나게 쳤을 뿐인데 진짜로 대화를 나누는 기분이 들었다. 적어도 그 광경을 처음 본 사람이라면 내가 리액션은 좋지만 자기 얘기는 별로 하지 않는 과묵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실제로 이후 호스텔을 방문한 여행객 중 몇은 하루가 다 지나도록 나 역시 당연히 일본인 일 거라 여겼다고도 했다.
그렇게 엉망진창이지만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된 뒤 우리가 한 것은 지뢰 찾기였다. 세계대전 당시 나치가 버리고 떠난 지뢰를 찾아 금속 탐지기를 메고 폭우를 뚫고 나간 것은 아니다. 숙소에 딱 한 대 있는 공용컴퓨터-인터넷은 느리고, 성능마저 처참한-의 기본 게임인 지뢰 찾기를 모두가 같이한 것이다. 잡담의 소재거리가 떨어지면 누군가 컴퓨터 앞에 앉아 지뢰 찾기를 켠다. 지도의 사이즈는 최대로 크게 만든다. 그리고 말없이 조용히 지뢰를 찾기 시작한다. 딸깍딸깍. 빗소리 사이사이 마우스 클릭 소리만이 들린다. 할 게 없는 누군가가 슬그머니 뒤에 다가서 훈수를 둔다. 그것을 구경하는 하나가 더 따라선다. 종반엔 열 명이 우르르 둘러싼 채 마지막 지뢰 하나를 찾기 위해 갑론을박을 벌인다. 그렇게 심사숙고 뒤에 골랐으나 지뢰가 터지고 만다. 그러면 모두가 큰소리로 한탄했다. 창밖으론 여전히 비가 쉼 없이 쏟아지고 있다.
장마와 함께 지뢰 찾기가 끝난 뒤, 우리는 다 같이 외국인 카지노에 놀러 갔다. 카지노에 가면 공짜 음료와 핑거 푸드를 먹을 수 있다는 얘기를 들어서였다. 입장을 하기 위해 만원 정도를 칩으로 바꿨지만, 하나같이 남이 하는 것을 구경하며 먹을 거로 배를 채운 뒤 다시 환전해 유유히 숙소로 발길을 돌렸다. 기나긴 장마가 끝나서일까 공기는 맑고 거리는 깨끗했다. 기분이 좋아진 나는 모두에게 사과를 넣은 바니차를 사줬다. 겹겹이 쌓인 페이스트리를 돌돌 말아 만든 불가리아 디저트인 바니차를 먹으며 한 친구는-이름이 아마 사토미였다- 연신 '스고이'(대단해)를 연발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며칠간 내내 비가 내려 매일 같이 숙소에서 스파게티만 만들어 먹느라 불가리아 디저트를 먹어본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내가 숙소를 떠나는 날. 친구들은 거실에 나를 불러 세운 뒤 돌아가며 선물 하나씩을 건네며 덕담을 해줬다. 거창한 이별식이었다. 그중 가장 가까웠던 친구인 켄지는 너덜너덜한 포르노 잡지를 주면서 “한국 사람 좋아해요. 특히 여자만”이라고 말했다. 내게 알려 달라 부탁한 한국말이었다. 어찌 됐든 감동의 이별을 마친 뒤 불가리아 속 작은 일본을 떠나는 기분은 여느 때보다 더 쓸쓸했다. 크로아티아 국경을 넘어서다 짐 검사를 당하는 바람에 금세 쪽팔림으로 바뀌었지만. 친구의 선물이라는 나의 말을 국경수비대원은 믿지 않았다.
글·그림 김보통(만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