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백문영의 먹고 마시고 사랑하기
더웠던 날이 언제였는지 모르겠다. 목에 닿는 선득한 바람에 따뜻한 니트를 꺼내 입는 초가을이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기분 좋은 날씨를 그냥 보내기가 문득 아쉬워 급하게 업무를 마무리하고 오후 을지로3가 공구 거리로 향했다. 해 질 녘 노을이 부서지는 을지로3가는 이국적이다. 방문할 때마다 새롭다. 좁은 골목으로 들어서면 ‘만선 호프’를 시작으로 5~6개의 호프집이 줄지어 서 있다. ‘주당들의 천국’이다. 수많은 대화, 취기 어린 얼굴 등 이곳에서 나눴던 추억이 잊힐세라 지난여름 앉았던 만선 호프에 다시 걸터앉았다.
앉자마자 생맥주 500㏄와 노가리가 재빠르게 앞에 나타났다. 센 불에 빠르게 구운 노가리에는 온기가 남아 있다. 시원하게 맥주부터 한 모금 들이켠 뒤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래야 노가리를 거침없이 뜯을 수 있다. 나도 한 점, 동행한 상대방 입에도 한 점 넣었다. 라면 수프 맛 양념장이나 고소한 마요네즈에 찍어 먹었다. 한 잔을 5분 만에 비워 버렸다.
‘만선 호프’ 종업원이야말로 진짜 프로다. 운동장만큼 넓은 홀인데도, 아이돌 공연장보다 더 시끌벅적한데도 “여기요!” 굳이 목 놓아 부르지 않아도 제때 맥주를 가져다준다.
도시의 가을바람 맞아 가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몇 잔을 마셨는지도 잊은 채 해가 저문다. 동행한 이에게 웃으면서 “식전주를 마셨으니 따뜻한 것 먹으러 가자” 말하며 슬슬 걸음을 재촉했다.
우리가 찾은 곳은 고소한 전 냄새가 풍기는 ‘원조 녹두’였다. 전 종류만 10가지가 넘지만 묘하게 동그랑땡과 고추전을 꾸준히 찾게 된다. 돼지고기를 잘게 다져 구운 동그랑땡은 고소한 돼지고기 향과 촉촉한 육즙이 환상적으로 어우러진다. 게다가 이곳의 고추전은 속을 파내 부치는 일반적인 고추전과는 다르다. 향긋한 쪽파 위에 돼지고기와 달걀 반죽, 얇게 썬 청양고추 조각을 가득 뿌려 구워서 맛이 독특하다. 폭신한 계란과 아삭한 청양고추의 식감 덕에 씹을 때마다 신이 난다. 동그랑땡 하나, 고추전 한번 먹고 나면 홀린 듯 냉장고 문을 열게 된다. ‘지평 막걸리’를 꺼내 한잔 가득 따르면 ‘아이고, 너무 좋다’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지평 막걸리는 인공적인 탄산도 없고 단맛도 적다. 담백하고 슴슴한 이곳의 전과 먹었을 때 가장 맛있다.
가게 문을 닫는 밤 11시까지 실컷 먹고 얼큰하게 취해 나오는 길은 아늑하고 포근했다. 술기운인지 곁에 있는 사람 때문인지, 그날은 두근거리는 밤이었다.
백문영(<럭셔리> 라이프스타일 에디터)
’원조녹두’의 전. 박미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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