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창간 안내서. (※ 이미지를 누르시면 확대됩니다)
#장면 1. 3월31일 밤 11시30분. 창원 마산 고속버스터미널
낡은 버스터미널에는 심야우등고속버스를 기다리는 취객들로 가득하다. 수명이 다한 전등은 누런 천장에 매달려 흔들거린다.
여자: (놀란 토끼눈을 하고 스마트폰을 노려본다) 이 늦은 시간에 웬 인사발령!
벽에 걸린 시계를 무심코 쳐다보다가 벌떡 일어나 달려간다.
여자: 앗, 12시가 넘었네. 큰일 났다.
#장면 2. 4월3일 오후 5시. 한겨레신문사 6층 야외정원
따사로운 봄볕이 삐꺽이는 나무탁자에 내리쬔다. 어디선가 까치 울음소리가 들린다. 마치 운명을 예고하는 듯. 남녀가 고개를 맞대고 소곤거린다.
여자: 에디터, 어쩔까요? 고민이 많이 돼요. 저쪽에서 격하게 화낼지도 몰라요.
남자: 그러게요. 저야 (당신의) 결정이 그저 감사할 따름이지만. 좋으신 대로 정하세요.
이 장면에서 주인공은 바로 접니다. 지난달 31일과 지난 3일, 저는 한 가지 ‘출발’을 놓치고 또 다른 ‘출발’을 취소했습니다. 팀장 발령이 났기 때문입니다. 첫번째 장면은 인사발령을 동공이 확장된 채 노려보다가 결국 서울행 심야버스를 놓친 광경입니다. 결국 새벽 1시, 만취 트림을 내뿜는 취객의 옆자리에서 그가 먹은 안주를 궁금해하다가 잠을 청했죠. 저도 찌든 땀 냄새로 소심한 복수를 했습니다. 두번째 장면은 호주 출장을 두고 고민하는 모습입니다. 남자는 당연히 안수찬 미래라이프 에디터죠.
지난주부터 ESC팀 팀장이 된 ‘박미향’ 인사드립니다. ‘ESC 화석’이라고 불릴 정도로 ESC팀에 오래 있었습니다. 숱한 신화를 남긴 ESC의 영광을 제가 이어갈 수 있을지 부담감이 앞섭니다. 발령 나고 한 후배가 얇은 책자 하나를 건네더군요. 10년 전 만든 오렌지색의 ESC 창간 안내서였어요. 첫 장부터 예사롭지 않더군요. ‘당신은 무슨 재미로 사십니까?’, ‘올바른 삶의 기준보다는 신선한 삶의 기준을 제시하겠습니다.’ 10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이 질문과 결의는 유효합니다.
네, 신나게 <한겨레> 선후배들과 박장대소, 깨알 재미, 뒤로 넘어져 코가 깨져도 헤헤거리는 허술한 인생관을 십분 발휘해 웃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지면을 만들겠습니다. 오는 5월이면 ESC가 세상에 나온 지 10년입니다. <무한도전> 시즌 2에 버금가는 ESC의 새로운 시즌을 준비할 생각입니다. 두 가지 ‘출발’은 떠나갔지만 제 앞에 등장한 새로운 ‘출발’에 가슴이 뜨겁습니다. 독자님들과 이 ‘출발’을 함께할 겁니다. 많이 도와줍쇼!
박미향 ESC팀장
m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