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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곤한 편의점

등록 2017-03-02 08:27수정 2017-03-02 08:33

Let's ESC
슈크림빵. 비주얼헌트
슈크림빵. 비주얼헌트
‘어머, 웬일이야? 이렇게 맛있어도 돼?’

오래전 대만으로 출장을 갔을 때의 일입니다. 맥주를 사려고 숙소 앞 편의점에 들어갔는데 슈크림빵을 사면 음료를 끼워 준다더군요. 아침식사가 나오지 않는 숙소라, 그러잖아도 빠듯한 경비도 아낄 겸 냉큼 집어 들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비닐 포장을 뜯어 주먹만한 슈크림빵을 한입 삼키고는 충격에 빠졌습니다. 대규모 공장에서 찍어낸 빵이니 맛은 당연히 ‘거기서 거기’일 거라 생각하고 별 기대를 안 했는데, 부드럽고 적당히 달짝지근한 이 슈크림이 예상을 깨고 너무 맛있는 겁니다. 한번만 먹고 말기엔 아쉬워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내리 사흘 동안 이 빵으로 아침을 해결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비교가 안 됐던 한국 편의점도 이젠 ‘장난’이 아닙니다. 각 편의점 브랜드에서 자체 생산하는 피비(PB) 제품이나 독점 수입하는 음료들을 보면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삼각김밥만 해도, 더는 ‘고작 삼각김밥’이 아니죠. 참치마요와 불고기밖에 없던 시대를 넘어 이젠 비엔나소시지에 만두, 새우볶음밥 등 각양각색의 속재료가 고객을 기다립니다. (가끔, 해장을 출근길 삼각김밥으로 하는 전 요즘 교동짬뽕에 꽂혀 있습니다.)

낯선 곳, 특히 소도시나 시골에 갔을 때 이런 편의점을 발견하면 일단 안심이 됩니다. 그곳에선 언제든 제가 사는 대도시에서 먹고 마시고 누리는 ‘표준화된’ 음식과 물품, 서비스를 구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한번은 낭패를 본 적이 있습니다. 바닷가 마을에 여행을 갔을 땝니다. 밤늦게 편의점에 갔더니 문이 닫혀 있더군요. 이해가 잘 안 됐습니다. 밤이 됐다고 편의점이 문을 닫다니, 이게 무슨 편의점이야? 왔던 길을 되짚어 숙소로 돌아오는 길은 캄캄했습니다. 아차 싶었습니다. 밤이 되면 어두워지는 게 당연하고, 어두워지면 사람은 자야 한다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습니다. 편리함 때문에,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어서 또는 그 어떤 이유로든, 24시간 잠들지 못하는 세계가 ‘제정신’이긴 어렵지 않을까요.

삼각김밥을 사려고 편의점 문을 여는 일은 그래서 늘 주춤거려집니다. 통유리창 안쪽, 계산대 뒤 간이의자에 초로의 아주머니가 앉아 졸고 있는 게 보입니다. 간밤의 피로가 고스란히 배어 있는 얼굴, 제가 들어가면 문에 달린 종소리에 퍼뜩 깨 민망한 표정으로 “어서 오세요” 인사할 얼굴. 그 잠시의 휴식을 제가 깨는 게 맞는 걸까, 고민은 해결이 잘 안 될 것 같습니다.

조혜정 팀장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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