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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은 껌처럼 씹고 버렸다

등록 2016-09-08 09:48수정 2016-09-08 09:53

[Let's ESC]
껌 종이를 모은 적이 있습니다. 달콤한 향기가 밴 껌 포장지엔 신석정의 <임께서 부르시면> 같은 목가적인 서정시가 인쇄돼 있었죠. 시를 공책에 베껴 쓰고, 시인의 이름을 외우며 우쭐해하곤 했습니다. 같은 시가 적힌 포장지는 곱게 접어 학으로 변신시킨 뒤 책상 앞 책꽂이 위에 진열했고요. ‘팬시점’에서 ‘소녀소녀한’ 그림 위에 윤동주의 <서시>가 적힌 액자를 사다 벽에 걸어두기도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땐 벽시계에도, 편지지에도 시가 적혀 있었다는 게 기억나는군요.

시가 공기처럼 흐르던 시절을 기억하는 분들과 함께 이 시를 나누고 싶습니다. 시의 제목처럼 ‘삼십대’든 아니든, 상관없겠습니다.

조혜정 팀장 zesty@hani.co.kr

삼십대/심보선

나 다 자랐다, 삼십대, 청춘은 껌처럼 씹고 버렸다, 가끔 눈물이 흘렀으나 그것을 기적이라 믿지 않았다, 다만 깜짝 놀라 친구들에게 전화질이나 해댈 뿐, 뭐 하고 사니, 산책은 나의 종교, 하품은 나의 기도문, 귀의할 곳이 있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지, 공원에 나가 사진도 찍고 김밥도 먹었다, 평화로웠으나, 삼십대, 평화가 그리 믿을 만한 것이겠나, 비행운에 할퀴운 하늘이 순식간에 아무는 것을 잔디밭에 누워 바라보았다, 내 속 어딘가에 고여 있는 하얀 피, 꿈속에 니가 나타났다, 다음 날 꿈에도, 같은 자리에 니가 서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너랑 닮은 새였다(제발 날아가지 마), 삼십대, 다 자랐는데 왜 사나, 사랑은 여전히 오는가, 여전히 아픈가, 여전히 신열에 몸 들뜨나, 산책에서 돌아오면 이 텅 빈 방, 누군가 잠시 들러 침만 뱉고 떠나도, 한 계절 따뜻하리, 음악을 고르고, 차를 끓이고, 책장을 넘기고, 화분에 물을 주고, 이것을 아늑한 휴일이라 부른다면, 뭐, 그렇다 치자, 창밖, 가을비 내린다, 나 흐르는 빗물 오래오래 바라보며, 사는 둥, 마는 둥,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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