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ESC]
화가 날 때가 있습니다. 오랜만에 ‘신호’가 와서 화장실에 앉았는데, 옆 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저녁에 곱창 먹을까, 대창 먹을까?” 변기 물 내려가는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통화하는 건 그 사람과 전화받는 사람 사이의 문제지만, 옆에서 나는 큰 소리에 제 집중력은 그만 깨지고 맙니다. 지하철에서 큰 소리로 떠들거나, 전화기를 붙들고 세상 쓸데없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쏟아내는 사람들을 보면 뚜껑이 열립니다. 허세로 중무장한 남자, 공주병 극심한 여자와 맞닥뜨릴 때도 마찬가집니다. 어쩜 저렇게 무례할까, 치밀어오르는 신경질은 결국 내가 유난스러운가, 자책으로 이어집니다.
연세대 도서관에서 물난리가 난 지난 1일에도 화가 났었습니다. 7일치 ESC 커버 이미지 회의를 하며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데, 동거인한테서 날아온 메시지. “집에 물난리 났다. 벽 타고 물이 줄줄줄.” 함께 보내온 사진으로 보니 거실 바닥에 물이 찰랑찰랑하더군요. 당장 집으로 달려가고 싶지만, 왜 꼭 이럴 땐 해도해도 일이 안 끝나는 걸까요? 저녁 8시께 간신히 집에 가보니 거실 창문 위쪽 벽 너댓 곳에서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것처럼 물이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수건이란 수건은 죄다 꺼내 바닥으로 떨어진 물을 닦고 짜내고 또 닦고 또 짜내고….
이럴 때 세입자가 할 수 있는 건 집주인 재촉하기뿐이죠. 그런데 집주인 아줌마는 “이 비에 누가 와서 손을 보겠어?” 소리만 반복하지 뭡니까. 듣다 듣다 못 참고 “아주머니 집이 이렇게 됐어도 그렇게 말씀하시겠어요? 밤새 어떻게 이러고 있어요?” 쏘아붙였어요. ‘벽의 눈물’은 두어 시간 뒤 집주인 아저씨가 옥상에서 이어진 하수 배관이 막힌 걸 발견하고 뚫은 뒤에야 멎었습니다. 저도 그제야 바깥 상황을 확인할 여유가 생겼습니다. 우산을 챙겨 쓰고 아저씨가 배관을 손보고 있는 데로 갔다가 멈칫했습니다. 작업하는 데 거추장스러운 우산을 안 쓰고 장대비를 그대로 맞아, 퉁퉁 불어버린 가죽신발에 눈길이 멎었습니다. 가족 ‘드립’ 참 싫어하는데, 아빠 생각이 났어요. 우리 아빠도 저러실 텐데…. 화가 사그라들었습니다. “감기 안 걸리시게 따뜻한 물로 샤워하시고, 편안하게 주무세요.” 제 방식으로 미안함을 표현했습니다.
뒷정리를 다 한 뒤 동거인과 함께 매운 떡볶이를 먹었습니다. 혀와 귀에선 불이 났죠.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아까 아줌마한테 화낸 건 잘못한 게 아니라고, 아저씨한테 미안해한 건 어쩌면 그 화 때문이라고.
조혜정 팀장 zesty@hani.co.kr
물난리가 난 조혜정 팀장의 집. 동거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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