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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에 절망해 못쓴 시, 세월호 계기로 다시 쓰겠다”

등록 2016-04-20 19:54수정 2016-04-21 09:50

이우성 시인.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이우성 시인.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매거진 esc] 이우성의 좋아서 ‘응한’ 인터뷰
‘이우성의 좋아서 하는 인터뷰’ 연재 마친 이우성 시인을 직접 인터뷰하다
‘이우성의 좋아서 하는 인터뷰’가 지난달 끝을 맺었다. 2014년 7월부터 20개월 넘게 격주로 여러 사람들 이야기를 풀어온 장기 연재물이다. 잡지 에디터 출신이자 시인 이우성은 여느 인터뷰 글과는 다른, 자신만의 독특한 시선을 녹여낸 글로 고정 독자층을 만들어냈다. 그냥 보내긴 아쉬웠다. 그래서 번외편으로 그를 직접 인터뷰했다. ‘이우성의 좋아서 응한 인터뷰’다. 이제부터 인간 이우성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인터뷰를 하는 게 아니라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전에도 이런 적 있나?

“꽤 있다. 시집 나왔을 때, 또 잡지 에디터로서도 응한 적 있다. 하지만 인터뷰를 당하는 건 아무래도 어색하다. 언어 자체에 대한 불신이 있다. 내가 말하는 게 날 얼마나 드러낼 수 있을까 하는 거다. 사실 난 누군가를 인터뷰하면 좋은 면을 부각해주고 싶다. 거꾸로 나의 좋은 면만 드러난다면 그게 부담된다. 난 대단한 사람이 아닌데, 그렇게 보일까봐. 그래서 인터뷰에 응하는 건 나와 잘 안 맞는 것 같다.”

-그래도 순순히 응했다.

“누가 인터뷰하자고 하면 즐거운 마음으로 응했다. 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닌데도 제안해준 사람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어서다. 또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많다. 이 사회에 대한 불만이라든지….”

-연재를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우연히 알게 된 esc 기자님이 기고를 제안해주셨다. 내가 잡지 에디터이자 시인이기도 하고, 또 취향이 특이해 보여 신기했나 보다. 그래서 ‘내가 슈퍼맨이 된다면’, ‘가장 찌질했던 연애의 기억’, ‘이태원 야외수영장 체험기’ 같은 재미있고 발랄한 글들을 부정기적으로 썼다. 그러다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연재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해왔다. 에세이면 하단의 작은 글이어서 부담 없이 시작했다.”

-그러다 연재물이 커졌다.

“두달인가 지나서 에세이면 윗자리가 비었다고 했다. 성석제, 김연수 같은 명성 있는 작가들이 그 자리에 글을 썼는데, 누군가가 빠져서 내가 땜빵을 하게 된 것이다. 농담으로 이랬다. 내가 성석제랑 투톱이야. 김연수랑 투톱이야.(웃음)”

-보통 인터뷰 글과 달리 이우성 자신의 시선과 목소리가 많다.

“일반적인 인터뷰라면 굳이 내가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잡지 기자로 배우 이정재를 두 달 새 두 차례 인터뷰한 적이 있다. 이정재가 나를 기억 못 하더라. 수많은 기자들이 비슷한 인터뷰를 했기 때문이다. 이걸 시작하면서 나만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그 사람을 말하자, 마음먹었다.”

-인터뷰 대상은 어떻게 정했나?

“우선 주변의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 때마침 전시를 하거나 책이 나온 경우 인터뷰했다. 몰랐던 사람에게 연락하기도 했다. 미술가 이우성이 대표적이다. 포털에서 내 이름을 검색하다 존재를 알게 됐는데, 작업이 재밌어서 인터뷰를 청했다. 책이든 작품이든 보고 호기심이 생겨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그렇게 했다. 그런 인터뷰가 반은 될 거다.”

-글이 나가고 나면 기분이 어땠나?

“두 가지다. 하나는 좋았다, 다른 하나는 미안하다. 내가 인터뷰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독단적이긴 하지 않나. 그걸 그 사람이 좋아해주면 다행인데, 그게 아니라면 미안한 거다. 좋은 얘기든 아니든, 내가 재단해버리는 걸 상대방이 안 좋아할 수도 있다.”

-그래서 ‘인터뷰가 아니라 에세이 아냐?’라는 반응도 있다.

“안다. 그런 반응을 접하면 계속해야 하나 고민할 정도로 상처를 받는다. 연재하면서 칭찬도 많이 들었고, 모르는 분이 장문의 이메일을 보내 좋았다고 하기도 했다. 그렇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반대로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는 얘기다. ‘인터뷰가 아니라 제 하고 싶은 말만 썼다’는 반응이 대표적이다. 사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려고 한 게 아니다. 이 사람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고 그걸 전하고 싶었던 거다. 다만 내가 이 사회에 불만이 많다 보니 그런 내용을 군데군데 넣은 건 있다. 우리나라에선 사회적 유명 인사들이 정치적 의사를 잘 안 밝힌다. 그게 싫다. <한겨레>의 큰 지면에 글을 쓰는데, 내가 이 한마디는 할 수 있어야지 하는 의무감이 들었다.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다. 마음 아팠지만 멈추고 싶진 않았다.”

-비난을 어떤 식으로 했나?

“인터넷 댓글이다. 예를 들어 글에서 세월호 관련 언급을 많이 했는데, 댓글은 ‘지겹다. 언제까지 그 얘기 할 거냐’고 한다. 이해할 수 없다. 언제까지가 아니라 잘 마무리하고 해결하는 게 중요한 것 아닌가? 경제가 어쩌고 하는데, 애 하나 못 살리는데 경제가 중요한가? 경제를 왜 살리는데? 부가 공평하게 분배되고 모두가 행복하게 잘 살기 위한 거다. 이 사고 원인을 규명하고 잘못한 사람 처벌하고 해야 그게 모두가 행복하게 잘 사는 거 아닌가? 대기업이 엄청나게 돈 많이 버는데 아직도 굶어죽는 사람이 있다는 게 말이 안 된다.”

“일반적인 인터뷰가 아니라
나만의 시선, 나만의 목소리
그걸 독자에게 전하고 싶었다
힘들었지만 만족하고 후회 없다”

“세월호 희생자 ‘생일시’ 쓰려고
아이 얘기 듣고 사흘간 울었다
어른들이 이대로 있어선 안된다
나도 이제 더는 피하지 않겠다”

-마음이 여린 편인 것 같다.

“내 마음이 여리고 아프기도 하지만, 유가족이 만약 그 댓글을 읽으면 얼마나 마음 아프겠나?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면 공식적으로 토론하거나 해야지, 댓글로 사람 마음 아프게 하는 건 비열한 짓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댓글이 연재를 그만두는 이유 중 하나라고 했다.

“그도 그렇지만, 근본적으로는 인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역량을 다 쏟아부어 정말 미련 없이 썼다. 후회 없고, 만족한다. 계속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여기서 멈추고 다시 채운 뒤에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한동안 인터뷰 글은 안 쓸 거다. 좀더 공부하고 나중에 할 거다.”

-연재하는 게 많이 힘들었나 보다.

“사실 글 쓰는 건 3~4시간이면 된다. 생각을 정리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사람에 대해 말하는 게 굉장히 어려운 거구나, 하는 걸 느꼈다. 지친 것 같다. 이 글 하나로 세상을 바꿀 순 없지만, 그 사람에게 자극과 위안과 굉장한 순간을 선물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어느 순간 독자가 아니라 이 한 사람을 외롭지 않게 위로하는 게 중요해지더라. 그 마음을 온전히 전달하는 게 힘들었다. 주변에선 좀 편하게 하라고 하는데, 어찌 사람을 얘기하는데 편하게 할 수 있겠나. 내가 좀 어렵게 생각한 것 같다. 내가 성숙해지면 좀더 자연스럽게 쓰게 되지 않을까 한다. 내 나이 37살인데, 더 공부해서 마흔에는 다른 글, 쉰에는 또다른 글을 쓰려고 한다.”

-인터뷰 말고 다른 글을 쓸 생각은 없나?

“박근혜 정부 들어 시를 거의 안 썼다. 나라가 이 모양이고 정치가 이 모양인데 시를 써서 뭐하나, 글 자체에 대한 무기력함을 느꼈다. 오은 시인이 내게 ‘시인은 시로 말해야 한다’고 했는데, 그걸 실행 못 하고 있다. 다른 글도 마찬가지다. 내 생각과 입장을 써야 하는데, 요즘은 너무 힘들다. 그래도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 자신과 싸우고 있는 중이다.”

-언제부터 시인이 되고 싶었나?

“스무살부터. 어릴 때부터 책 읽는 걸 좋아했다. 아빠가 세계전래동화전집을 할부로 사주셨다. 그게 그렇게 재밌었다. 문학 공부를 하면 어떨까 해서 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했다. 얼마 뒤 선배 손에 이끌려 시 동아리에 들어갔다. 그때부터 잘 몰라도 시를 읽고 쓰고, 눈만 뜨면 시에 빠져 살았다. 그 시절이 참 행복했다. 그땐 세상의 문제, 불만 이런 것도 잘 몰랐다.”

-200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다.

“스무살부터 계속 시를 쓰고 했지만, 자신감이 없었다. 그러다 29살에 시를 내보자 했다. 운이 좋아 그해 세번째 시도 만에 등단했다.”

-잡지 에디터는 언제부터 한 건가?

“2005년 4월부터. 대학교 졸업하고 바로다. 시는 계속 쓰고 싶고 해서, 그래도 글을 쓰는 직업을 갖자 한 거다. 초반에는 너무 바빠 2년간 시를 못 썼다. 어느날 눈물이 엄청 나더라. 시 쓰려고 이 직업을 택했는데, 왜 이러고 있나, 재능이 있든 없든 써보자 했다. 이후 참 열심히 썼다.”

-2012년 낸 첫 시집 <나는 미남이 사는 나라에서 왔어>(문학과지성사)를 읽어보니 좀 많이 어렵더라.

“시가 쉽게 읽혀선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사실 시라는 게 인생인데, 그렇게 쉽게 의미가 잡히면 너무 가볍다고 생각한다. 더 깊은 진리를 찾기 위해 작품을 오래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내 시가 어렵다는 말은 인정하지만, 그 시를 얼마나 고민하며 읽어봤냐고 되묻고 싶다. 요새 다들 긴 글 안 보고 에스엔에스(SNS) 시만 본다. 그걸 비난하는 건 아니지만, 비장함을 가지고 문학을 읽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문학과 정면으로 맞닥뜨려야 한다. 내 시가 어려운 건 맞다. 그런데 다음 시집은 좀 쉽게 쓰려고 한다. 시로 사상을 강요하려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 이 시대에는 작가의 생각을 좀더 명확하게 전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세월호, 4대강 같은 여러 문제를 제기하고 제동을 걸 필요가 있다.”

-다음 시집은 언제 나올까?

“등단하고 3년 만에 첫 시집이 나왔다. 굉장히 빠른 거다. 보통 4~5년, 6~7년도 걸린다. 그런데 두번째 시집이 늦어지고 있다. 출판사와 계약도 안 돼 있고, 세상이 그렇고 해서다. 글을 쓴다는 게 자기 내면을 드러내는 일이라 그리 쉽진 않다. 나처럼 마음 여린 사람에겐 이런 시대에 더욱 그렇다. 작년에 ‘생일시’(세월호 희생자 생일에 맞춰 시인이 그 아이의 목소리를 대신해 시를 쓰는 프로젝트)를 하나 썼다. 아이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얘기를 읽으면서 사흘 동안 더 눈물이 날 수 없을 정도로 울었다. 아이는 죽을 이유가 없는데 죽었다. 시는 3~4시간 만에 썼지만, 쓰기까지 많이 괴롭고 힘들었다. 생일시를 쓴 시인은 그 아이의 생일 잔치에 못 간다. 힘들어서다. 그런데 나는 갔다. 두 시간 동안 엄청나게 눈물이 나왔다. 어른으로서 책임감을 다하지 못해서 이 아이가 죽었다.(이 대목에서 그는 눈시울이 붉어지고 목이 막혔다) 어른들이 이대로 있는 건 말이 안 된다.”

-세월호 참사가 큰 계기가 된 것 같다.

“이제 피하거나 그럴 상황이 아니게 됐다. 최근 시를 두편 정도 썼다. 2~3년 안에는 시집을 낼 거다. 출판사와 얘기가 잘 안된다면, 내가 자비로 인쇄할 수도 있다.”

-글에서도 자주 밝히듯 눈물이 많은 것 같다.

“맞다. 아빠가 잘 우셨다. 내가 아빠를 닮은 모양이다. 해병대도 나오고 몸 쓰는 일도 잘하는데, 이상하게 눈물이 많다.”

-그런 면이 글 쓰는 데 도움이 되는 것 아닐까?

“눈물이 많아선지 사람들에 대해 공감, 동질감을 더 갖는다. 사람뿐 아니라 사물, 사건에도 더 섬세하게 다가간다. 시인으로서 훈장 같은 건데, 더 예민하고 섬세하게 바라봐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무감도 갖는다.”

-그런데 해병대 나왔나? 안 어울리는 것 같다.

“해병대에도 섬세하고 순박한 사람 많았다. 중대장은 훈련 마치고 내게 ‘시 한 수 읊어봐라’ 했다. 해병대 삼행시 짓기로 연대장 포상 휴가도 받았다.”

-자신의 호를 ‘미남’이라 붙였다. 언제부터 그랬나?

“(쑥스럽게 웃으며) 대학교 3학년 때부터. 처음엔 ‘얼짱’이라 붙였는데, 좀 그렇더라. 그래서 바꿨다. 나를 남들과 다르게 소개해보자는 취지였다. ‘국문과 이우성입니다’보다 ‘미남 이우성입니다’라고, 내 언어를 보여주자 한 거다.”

-자신을 미남이라 생각하나?

“거울 보고 잘생겼구나, 생각한다. 어느 정도까지 생겨야 잘생겼다고 하는 기준이 있나? 나는 후하게 본다. 나도 그렇고 다른 사람도 그렇고. 기자님도 내가 보기엔 잘생겼다. 문학적으로 ‘미남’이라는 건 의미가 다르다. 문학계에는 엄숙하고 전통적인 분위기가 있다. 시인은 차분하고 겸손하고 그런 이미지가 있는데, 난 그런 사람이 아닌데 하며 반항하는 마음도 생기고 해서 시도 좀 그렇게 썼다. 출판사에선 <나는 미남이 사는 나라에서 왔어>라는 제목을 반대했다. 한국 사회에선 튀는 걸 싫어하는데, 그건 대한민국이 망하는 길이다. 다양한 개성과 입장과 모습을 존중해야 한다.”

-최근 ‘미남컴퍼니’라는 회사를 차렸다.

“콘텐츠 크리에이티브 그룹, 유무형의 콘텐츠를 만드는 회사다. 생긴 지 4~5달 됐다. 기업 행사도 하고 디지털 기반의 여러 콘텐츠도 만든다.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건, 문학 이런 거 다 떠나서 아주 창의적인 콘텐츠를 해보자는 거다. 행사 초대장 하나를 만들더라도 창의적으로 해보자는 거다. 진행중인 프로젝트 중 하나가 위스키 마케팅이다. 조만간 창의적인 결과물이 나올 거다. 회사 자체 기획으로 ‘심야책방’이라는 밤샘 북토크도 하고 있다. 작가, 패널들과 책에 대해 얘기하고 새벽 5시까지 각자 책도 보고 하는 행사다. 매달 첫째주 금요일 저녁에 하는데, 페이스북을 통해 공지한다.”

-마지막 질문이다. 연재물 중 특히 좋았던 글을 꼽는다면?

“김민정(시인) 누나. 특별히 인터뷰를 따로 하진 않았는데, 내가 평소 누나를 잘 알고 있어서 그냥 내 안에서 저절로 나오는 얘기들이 있었다. 누군가는 이 사람의 이런 면을 반드시 써줬으면 했는데, 그걸 내가 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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