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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도 죽은 시대, 죽어도 산 나무를 만든다

등록 2016-01-06 20:24수정 2016-01-07 10:59

양정욱 작가. 사진 김정근 사진가 제공
양정욱 작가. 사진 김정근 사진가 제공
[매거진 esc] 이우성의 좋아서 하는 인터뷰
미술가 양정욱 “동시대를 읽고 작품으로 드러내지 않으면 결국 혼잣말밖에 안돼”
나무가 걷는 모습을 누구나 한번은 생각해보지 않을까? 나무는 걷지 못한다. 나무는 살아 있다.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땅에 뿌리박고 자라는 나무와 잘린 나무는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 물론 큰 차이가 있다. 살아 있거나 죽어 있으니까. 하지만 살아서도 죽어 있는 것이 있다. 죽어서도 살아 있는 것이 있다. 공식적인 지면에 이딴 얘기를 하는 것은 옳지 않지만 지금 이 시대는 살아 있지만 죽어 있다. 하지만 죽고도 살아 있는 사람이 있다. 나무는 나에게 이러한 아이러니의 증거다. 나무는 더 크고 더 넓다. 나무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쓸데 없는 소리다. 어차피 쓸데 있는 소리를 해봤자 귀를 막고 듣지를 않으니까 소용없다. 이야기가 옆으로 샜는데, 양정욱(사진)이라는 작가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 나는 이 작가를 작년 여름에 만났다. 인터뷰를 했다. 그때 이 글을 쓰려고 했는데 안 썼다. 이 연재물 이름이 ‘좋아서 하는 인터뷰’라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 인터뷰하는데, 양정욱은, 모르겠다. 나는 이 작가에 대해 말하는 게 조심스럽다. 소중하게 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미술 전문가가 아니어서 이렇게 말하면 ‘까’이겠지만 양정욱은 이따위 시대에 과분하다.

“미술을 그만뒀어요.” 양정욱이 말했다. 과거형이다. 양정욱은 대학에서 조소를 전공했고, 졸업하자마자 주목을 받았다. “과분할 정도였죠. 신인인데도 불구하고 유명 갤러리에서 불러줬으니까.” 왜 그만뒀을까? “생각하는 작업을 하는 게 작가고, 그 생각을 보여주기 위해 작업을 하는 건데, 저는 그냥 만들고만 있더라고요. 그래서 그만뒀어요.” 그때 나는 양정욱의 작업실에 있었다. 그의 등 뒤쪽 벽에 걸린 나무 조형이 파르르파르르 소리를 내며 움직이고 있었다. 왜인지 모르지만 슬프고 눈물이 났다. 울지는 않았다.

생각을 보여주려 작업하는 건데
저는 그냥 만들고만 있더라고요
그래서 미술을 그만뒀어요
그러다 그 전화 한통에 돌아왔죠

그는 1년 동안 디자인 회사를 다녔다. “행복했는지 불행했는지도 모르고 그냥 살았어요.” 그러다 전화를 한통 받았다. “사실 전화를 계속 피하고 있었어요. 학자금 대출을 못 갚아서 독촉 전화가 엄청 걸려오는 시기였거든요.(국회의원들 월급 줄 돈으로 대학생들 학자금이나 내주라고 적으면 나는 영락없이 철없는 바보 멍청이가 되는 거겠지? 에이.) 그런데 이상하게 그 전화는 받고 싶더라고요. 받았더니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 이관훈 큐레이터였어요.” “왜요? 왜요? 그 사람이 왜?” 나는 보채듯이 물었다.

“왜 공모 안 냈냐고. 제가 학교 다닐 때는 매해 거기 공모를 냈거든요. 저는 그 공간을 좋아해요. 그래서 전시를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 큐레이터가 기억하고 있었던 거예요. 저를. 그냥 저는 평범한 대학생이었는데.”

이관훈이라는 이름을 크게 적고 싶다. 편애다. 양정욱에 대한 내 편애. 나는 양정욱한테 5000원짜리 지폐 하나도 받은 게 없다. 아, 거짓말하면 안 되지. 그가 직접 만든 열쇠고리를 받았다. 하지만 그거 받았다고 이렇게 쓰는 건 아니다. 이관훈 큐레이터의 전화 한통으로 양정욱은 돌아왔다. 학자금도 못 갚았으면서, 디자인 회사를 그만두고 다시 작가가 되다니. ‘헬조선’과 안 어울리는 영혼 같으니라고.

이때부터 양정욱은 나무를 재료로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나무를 쪼개고 붙이고 잇고 분리하고 쌓고 다시 나누고… 이렇게 만드는데, 뭘 만들지? 예를 들어 내가 좋아하는 작품은 ‘그는 선이 긴 유선전화기를 들고 한참을 설명했다’다. 시 제목도, 소설 제목도 이렇게 길게는 잘 안 쓴다. 그런데 미술 작품 제목이 이렇다. 도대체 뭘 만들기에 이런 제목이 떠오르는 걸까?

“무엇에 대해 이야기할지 정한 다음 글을 쓰기 시작해요. 제목, 내용, 상황, 캐릭터, 분위기를 설정해나가는 거죠. 예를 들어 ‘조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면 ‘조는 사람’에 대한 상황을 글로 먼저 정리해놓고 그 안에서 구조를 추출해 제작에 들어가는 거죠.” 양정욱이 말한다. 그러니까 제목을 읽으면서, 나무로 만들어진 작품을 보면서, 양정욱이 썼을 이야기를 떠올려보는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무엇을 썼을까? 알 수 없다. 그의 나무 작품은 추상적이니까. 그런데 추상적인 거 좋지 않아? 구체적인 건 명령하는 거 같잖아.

“사과를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떠올리는 이미지가 다르다고요. 이미지는 오히려 모호한 거예요. 작가가 나무에 매달린 사과를 봐요. 그것을 작품으로 만들어요. 제3세계의 누군가가 작품을 보고, 작가가 본 사과를 떠올릴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약속된 기호를 지워야 해요. ‘왠지 모르겠는데 어떤 사과가 떠올라’라고 느끼게 해주어야죠. 만든 사람, 보는 사람이 공통의 맥락을 가지려면 추상화시키는 게 맞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양정욱의 작품을 보는 게 나는 행복하고 좋다.

이 글 맨 앞에 나무가 걷는 것에 대해 썼다. 물론 괜히 쓴 게 아니다. 양정욱이 나무로 만든 작품은 공통점이 있는데 움직인다는 것이다. 잘랐으니 죽은 나무지만,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인다. 모든 작품이 그렇다. “균형에 대한 느낌은 사람마다 다르잖아요. 오늘의 생각과 내일의 생각이 다르고. 그런 가변성 때문에 저는 정지돼 있는 작품은 못 만들겠더라고요. 움직임을 통해, 수시로 변하는 또는 다른 사람의 생각들을 중간 어디쯤에서 만나게 하려는 거죠. 다른 이유는, 동시대를 읽어야 하기 때문이에요. 아무리 좋은 이야기를 하더라도 동시대의 고민, 현상들을 작품을 통해 드러내지 않으면 결국 혼잣말이 돼요.” 그리고 덧붙였다. “현재의 선택은 과거의 경험에 의한 거예요. 그러니까 유연해져야 해요.” 그의 등 뒤 벽에 붙어 있는 나무 조형은 계속 파르르파르르 소리를 내며 움직이고 있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작업실을 나올 때 양정욱은 자신이 직접 만든, 나무로 된 열쇠고리를 줬다. 삼수 끝에 조소과에 입학했다는 이 1982년생 작가는 사실 회화과에 들어가고 싶었으나 시험 점수가 낮아 못 들어갔다고 한다. 만들어야 하는 사람은 결국 만들게 된다. 마음을 주체할 수 없는 사람이 작가가 된다. 나는 그저 응원이 될까 하고 이 글을 쓴다. 이제 그만두지 말았으면 해서.

빤한 말이지만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양정욱의 작품 ‘너와 나의 마음은 누군가의 생각’이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 전시중이다. ‘아티스트 파일 2015: 동행’이라는 전시다. 한국과 일본 국교정상화 50년을 기념하기 위해 한국현대미술관과 일본 국립신미술관이 함께 기획했다. 한국 작가 6명이 선정됐고 양정욱도 그중 한명이다. 일본 따위랑 국교정상화한 게 기념할 만한 일인지 모르겠지만 양정욱의 작품이 전시되니까, 그리고 2015년 제56회 베네치아(베니스) 비엔날레 미술전 은사자상을 받은 임흥순 작가의 작품도 전시되니까, 가서 봐도 되지 않을까?

이우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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