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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완벽해서 아픈 그 장면들

등록 2015-11-04 19:11수정 2015-11-05 10:19

크리스티나 윤. 사진 조성재 작가 제공
크리스티나 윤. 사진 조성재 작가 제공
[매거진 esc] 이우성의 좋아서 하는 인터뷰
단편영화 <흰토끼> 연출한 크리스티나 윤 감독…“나는 완벽주의자”
<흰토끼>라는 영화를 보았다. 단편영화다. 여자 주인공은 신문을 읽고 있다. 그녀는 고등학생이고, 그녀가 다니는 고등학교는 외진 곳에 덩그러니 놓여 있다. 그녀는 한국 사람처럼 보인다. 학교에 한국 사람은 그녀뿐이다. 그녀는 앞머리로 얼굴의 반을 가렸다. 그녀에겐 친구가 없다. 슬펐다. 슬퍼해야 할 것 같아서 슬펐다. <흰토끼>는 여백이 많은 영화다. 시의 문장과 문장 사이의 간격처럼, 장면과 장면 사이의 간격이 넓다. 간격을 채우는 것은 우리의 상상이나 감정이다. 하지만 그 간격이 일관되지 않아서 완성도는 떨어졌다. 다만 나는 영화의 장면들이 모두 너무 완벽해서 아팠다. 그것은 내가 시를 쓰는 방식과 유사했다. 나는 어떤 장면을 은유의 맥락 속에 놓기 위해, 불필요한 것들을 완전히 거세해버리는 방식으로 시를 썼었다. 나는 그 결벽에 가까운 괴로움을 안다. 그래야만 하는 사람은 그래야만 하는 어쩔 수 없음을.

<흰토끼>는 크리스티나 윤이라는 감독이 연출했다. 2014년 미국 뉴욕대학교 티시예술대학의 졸업작품이다. 이 영화는 다수의 국제 영화제에 상영되었다. 그녀의 부모님은 한국 분이고, 그녀는 뉴욕에서 태어났다. 당연히 <흰토끼>의 등장인물들은 영어로 대화한다. 그러니까 나는 거의 ‘그림’으로만 영화를 봤다. 영어를 못하니까. 하지만 그 상태가 싫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어도 이해되는 상태. 좋은 작품은 어떤 방식으로든 감정을 전달하게 되어 있다.

“저는 완벽주의자예요.” 통역을 도와준 분이 말했다. 크리스티나 윤은 영어로 이야기했다. “그래서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려요. 모든 장면들, 모든 요소들이 제가 원하는 방식으로 준비돼 있어야 해요. <흰토끼>의 여자 주인공의 헤어스타일을 예로 들 수 있을 것 같아요. 매 장면을 찍을 때마다 다시 머리카락들을 만져야 했어요.” 그녀는 지금 한국에 있다. “어릴 때부터 제가 백인 아이들과 다른 환경 속에 있다는 걸 알았어요. 집에 돌아오면 한국 음식을 먹고, 부모님은 한국어로 대화하셨으니까요.” 나는 그녀의 경험이 부러웠다. 그녀는 언젠가 알게 될 것이다. 그런 경험이 창작자로서 그녀를 독특한 지점에 데려다 줄 거라는 사실을. “친구들의 부모님은 그들에게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말했어요. 하지만 제 부모님은 제가 의사나 변호사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어요. 그리고 친구들과 여행 가는 걸 반대하셨어요.” 그녀는 의사나 변호사가 되지 않았다. 그녀에게 그것이 다행인 일이어야 할 텐데.

한국에서 자라지 않은 한국 아이
그녀가 그리는 한국이 보고 싶다
이창동·봉준호 좋아한다는 그녀
이런 선배들이 있어 다행이다

그녀는 최근 위스키 복합문화 공간 조니워커하우스의 ‘아트 오브 블렌딩’에 참여했다. 아트 오브 블렌딩은 조니워커하우스의 아티스트 컬래버레이션 프로그램이다. 그녀는 3분짜리 영상을 찍었다. <댄싱 9> 출신 남진현과 그의 동료들이 조니워커하우스에서 춤을 추며 공간을 ‘유영’하는 영상이었다. 일렉트로닉 음악과 화면의 색감이 인상적이었다. 그 감각은 묘하게 낯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영상을 통해 그녀를 알게 되었다. 결국 <흰토끼>까지 찾아보게 되었고.

“사실 저는 잘 모르겠어요. 제가 어떻게 이런 프로그램에 선정되었는지.” 그녀의 이력 중에 흥미로운 게 있다. 그녀가 쓴 첫 장편 시나리오는 2014년 선댄스 재단 세미파이널리스트 명단에 올랐다. 선댄스 재단은 최고의 권위를 지닌 독립영화제 선댄스 영화제를 후원한다. “파이널리스트에 올라갈 수 있었어요….” 그녀는 여기까지만 말했다. 영어로. 그래서 내가 물었다. “무슨 내용인데요?” 한국어로. 그녀는 통역의 도움 없이 질문을 알아듣고 영어로 대답했다. “한국을 배경으로 한 로맨틱 드라마예요. 그런데 판타지 요소가 강해서 제작비용이 많이 들 거예요.” 돈이 많이 들면 영화로는 못 보겠지, 아마…. 보고 싶은데. “한국에 온 건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서예요. 그리고 한국이라는 나라를 더 잘 알고 싶어요. 한국에서 일을 하면서 경력도 쌓고 싶고요. 장기적인 목표는 장편영화를 찍는 거예요.” 그녀가 목표를 이루면 좋겠다고 적는 게 너무 개인적인가? 그럴 것 같다. 그런데 나는 보고 싶다. 한국에서 자라지 않은 한국 아이가, 그 낯선 감각을 어떤 식으로 표현하게 될지.

“한국 감독의 영화 중에서 기억에 남는 게 있어요?” 내가 물었다. “꼭 한국이어야 해요?” 그녀가 되물었다. “네.” 내가 답했다. “저는 유럽 영화에서 영향을 많이 받은 편이에요. 한국 영화는 많이 보지 않았지만 이창동 감독님의 <시>와 봉준호 감독님의 <살인의 추억> <괴물>을 좋아해요. <시>는 연출자가 캐릭터에 깊게 몰입한 영화예요. 캐릭터를 중심으로 스토리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인상적이었고, 저도 그런 면을 배우고 싶습니다. <살인의 추억>과 <괴물>은 비주얼이 혁신적이에요. 휴머니티가 느껴지고요, 무엇보다 진지한 코미디라는 점이 마음에 듭니다. 저는 이 두 감독님의 장점을 섞은 스타일의 영화를 만들고 싶어요.” 나는 애국자는 아니다. ‘헬조선’이란 단어나 입에 담는, 어떤 양반에 의하면 역사 교육을 잘 못 받아서 이 모양이 됐다는 문제 많은 젊은 애다. 하지만 크리스티나 윤이 두 감독에 대해 말할 땐 자부심을 느꼈다. 그녀에게 이런 선배들이 있다는 게 다행이고 고마웠다. 고맙다는 감정은 그녀를 향한 것이다. 나는 그녀를 한시간 만났을 뿐이고,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것 같지만, 한국인 부모님에게서 태어난 그녀가 유년을 타국에서 보냈다는 게, 왠지 마음에 걸린다. 아닌가? 이 따위 나라에서 살지 않았던 것을 축하해주어야 하나? “잘 왔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안 했다. 나라고 모르겠나, 이 맥락 없는 오지랖. “그래서 이제 부모님이 친구들과 여행 가라고 하세요?” 내가 물었다. “아뇨, 지금 스물다섯살인데도 안 된대요.” 그녀가 대답했다.

영화 <흰토끼>와 조니워커하우스와의 컬래버레이션 영상은 그녀의 웹사이트(www.christina-yoon.com)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기사가 나올 때쯤엔 유튜브에서 일렉트로닉 뮤지션 안톤 보린과 작업한 뮤직비디오도 볼 수 있다. 그녀의 최근 작업이다.

“저는 디테일이 모여서 하나의 이미지가 완성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작은 것들을 놓치고 싶지 않은 거예요.” 세부를 보자. 그리고 가능하다면 이 세부의 미래를 보자. 나는 그녀가 무엇인가 해낼 것만 같다.

이우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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