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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와 민, 1등 할 것 같아

등록 2015-01-28 20:23수정 2015-01-29 10:36

그래픽디자이너 ‘슬기와 민’. 사진 남기용 작가 제공
그래픽디자이너 ‘슬기와 민’. 사진 남기용 작가 제공
[매거진 esc] 좋아서 하는 인터뷰
그래픽디자이너 ‘슬기와 민’(사진)은 최슬기와 최성민의 ‘슬기’와 ‘민’이다. 둘은 부부다. 예일대학교 유학 중에 만났다. 이런 건 인터넷 찾아보면 나온다. 슬기와 민을 만났다. 최성민은 키가 크고, 최슬기는 작지만 미인이다. 질문하면 주로 최성민이 짧게 대답하고 최슬기는 듣는다. 둘은 무엇인가 합의가 되어 있고, 나는 그게 뭔지 모른다. 둘은 본질은 말하지 않고 표피를 말한다. 불친절해. 들을수록 모르는 게 많아진다. 지하 카페에서 나는 더 깊이 내려가는 기분이 들고, 슬기랑 민은 부유하는 느낌, 가까이 있어도 잡히지 않고, 그렇다고 멀어지지도 않고, 가슴으로 안을 수 있는 마을 같은 기분. 하지만 아득하다, 슬기랑 민은. 십분이나 늦게 왔는데, 미안하단 말도 안 하고!

슬기와 민의 작품 ‘테크니컬 드로잉’이 서울 신사동 아뜰리에 에르메스에 걸려 있다. 모두 7개인데, 전시장 가운데 서 있으면 액자들이 에너지 막을 형성하는 것 같다. 어지럽다. 다가가서 봐도 무엇인지 모르겠다. 슬기와 민은 모호한 형상을 액자 안에 담았다. 극도로 확대한 어떤 이미지를 인쇄해서 전시한 것이다. 이것은 의미에 관한 일반적인 사고를 전복시킨다. 깊이 이야기하면 복잡한데, 요약하면 이 경우 작품에 의미가 존재한다기보다, 그러한 이미지를 액자 안에 넣은 행위에 의미가 존재한다. 물론 이런 해석은 헛소리다.

“우리가 의도했던 것은 사실, 뭐라 그럴까, 가짜 깊이 같은 느낌? 컴퓨터로 작업해서 디지털 출력을 한 거지만 어쨌든 가상의 깊이가 실제로 느껴지기를 원했다.” 최성민이 말한다. ‘가짜 깊이’라는 표현에 집중해보자. 이 두 단어는 현대사회를 압축한다. 끝. 더 설명이 필요한가? 그런데 슬기와 민이 왜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전시를 하지? 그래픽디자이너인데. 범박하게 적자면 에르메스 재단에서 매해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을 개최하는데, 올해 세 팀의 후보 작가 중 한 팀으로 선정됐다. 미술가와 그래픽디자이너를 구분하는 건 무식한 발상인데, 어찌 됐건 슬기와 민은 그래픽디자이너로 불리고, 생업 역시 그래픽디자인이다. 놀라운 일 아닌가? 슬기와 민이 이 상의 최종 후보에 올랐다는 거. “전화로 연락을 받았어요. 그런데 바빠서 계속 일했어요. 뭐, 됐나 보다, 생각했어요.” 역시 최성민이 말하고 최슬기가 듣는다. 둘이 무덤덤하게 굴어서 민망했다. 보통 이럴 땐 맞장구를 쳐주는데.

“미술 작품이니까 이렇게, 디자인 작품이니까 이렇게, 라는 게 우리는 없어요. 늘 같은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요. 디자인은 클라이언트가 있고, 미술 작품은 없죠. 그 차이뿐이에요.” 최슬기가 말한다. 호들갑을 떨면서, 당신 둘은 뛰어난 사람이야. 비범하다고 할 수 있지, 이딴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안 했다. 나는 평범한 관객이니까. 그저 조금 미남인.

하지만 둘의 말을 이해는 할 수 있다. 오랫동안 슬기와 민의 작품을 보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래픽디자인 작품을 보았다. 간결하고, 복잡하다. 강렬한 색이 사용되지만 여백이 더 압도적이다. 어떻게 이 모순이 종이 위에 앉는가? 나는 그것이 예술적이라고 생각한다. 스마트폰을 들고 슬기와 민을 검색해보자. ‘안 친절한’ 둘이 만든 도록, 포스터, 책 표지 등을 찾아보자. 어때? 뭐가 느껴지나? 슬기와 민은 그들의 디자인 언어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 그것이 무엇일까 궁금하게 만든다. 좋은 미술 작품을 보며 우리가 작품에게 묻는 것을 그들의 디자인 작업을 통해서 동일하게 묻는 것이다. 그러니까 미술관에서 슬기와 민의 작품을 보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최슬기는 “우리 작업에 대해 우리가 말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요?” 말하고 최성민이 “기사는 아무렇게나 써도 돼요” 말해도 아주 조금만 밉다. 그러면 어때. 디자이너로서, 작가로서 그들의 언어는 작품 안에 있는 건데.

“저희가 1등 할 거 같아요.” 누가 최종 수상자로 결정될 것 같은지 묻자 최성민이 대답했다. “우리는 우리 작품이 좋아요.” 최슬기가 대답했다. 내가 보기에도 슬기와 민이 대상을 탈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앞서 몇 년 동안 내가 예측한 작가는 전부 수상자가 안 됐답니다’라고. 복수한 것 같아 기뻤다. 슬기와 민을 응원한다. 진짜다.

이우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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