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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로 살아내줘 고마워, 천우희

등록 2015-01-14 20:17수정 2015-01-15 10:21

천우희. 사진 나무액터스 제공
천우희. 사진 나무액터스 제공
[매거진 esc] 좋아서 하는 인터뷰
천우희(사진)를 두 번 만났다. 한 번은 인터뷰를 했고, 한 번은 우연히 술집에서 만났다. 인터뷰는 2013년 2월에 했다. 영화 <써니>에 대해 주로 물었다. “연기를 어쩜 그렇게 잘해요? 정말 본드 마신 여자애 같았다니까요.” “부모님이 보수적이세요. 그래서 ‘나 이제 다 컸어. 터치하지 마’ 같은 심정으로 연기한 거 같아요.” 천우희가 대답했다. 영화 <마더>에서 진구와 함께 이불 속으로 들어간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선배님이 잘 도와주셔서… 그런데 저 계속 고등학생을 연기하고 있어요. 액션이랑 멜로를 하고 싶은데.” 그때 나는 영화 <한공주>에 대해 물었어야 했다. 관심이 없었다. 저예산 독립영화 아닌가? 두 달 뒤 <한공주>가 개봉했다. 누적관객수는 22만4822명이다.

<써니>와 <마더>에서의 한공주는, 아니 천우희는 튀어나온 돌부리 같았다. 자신을 얼마나 혹사시켜야 그런 상태가 될까?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드는 심정으로, 인내심을 가지고 한 가지 일에 몰두하는 것, 그녀의 연기에서 그런 모습이 보였다고 적으면, 아마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이 ‘오버’한다고 하겠지?

우리가 자연스럽게 <한공주>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 그녀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천우희는 연기할 때 느끼는 괴로움을 겪어서 알지만, 그것의 속성이 정확하게 어떤 것인지,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또한 그것을 언어로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녀는 막연히 그것이 옳다고 느끼는 것 같았다. 천우희는 영화 자체보다 ‘공주’라는 여자아이에 대해 말했다. “이것이 한 소녀가 겪은 실제 사건이기 때문에 이 영화에 출연하는 게 옳은 일인지 고민이 됐어요. 그러나 이 영화는 어떤 폭력의 순간이 끝난 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요.” 그때 창을 넘어온 빛이 천우희의 왼쪽 볼에서 놀았다. 나는 웃었다.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화가 우울해질까봐 계획이라든지, 이상형은 무엇인지 따위로 화제를 바꿨다. 지금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한공주>에 대해 더 질문하지는 않을 것이다. 천우희에게 자기 안에 공주를 더 깊이 품고 숨겨두는, 아니 숨겨주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녀는 여전히 한공주였고, 한공주의 친구였다, 고 적으면 또 오버인가? 나중에 <한공주>를 보고 나는 그녀가 무엇인가 알아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뭔지 나는 모르지만, 천우희의 한공주는 튀어나온 돌부리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자꾸 돌출되어 보여서 슬펐다.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의 부조리에 의한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작년 11월, 영화 <카트> 시사회 뒤풀이 장소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는데 친한 남자 배우 한 명이 형광등처럼 밝은 빛을 내는 여자와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남자 배우가 나를 보며 말했다. “형, 우희예요, 우희. 형이 인터뷰하셨었잖아요.” 어? 천우희가 이렇게 예뻤어? 이렇게 밝은 여자였어? 순간 <카트>에서 천우희가 등장했던 장면이 머릿속에서 빠르게 지나갔다. 그리고 뜬금없게도 그 순간 내가 천우희에게 느끼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깨달았다. 그것은 고마움이었다. 한공주를 연기해준 고마움, 공주의 마음을 온전히 살아 내준 고마움, 그렇게 한 아이를 위로해준 고마움, 그리고 이렇게 밝게 한공주라는 인물을 놓아준 고마움.

천우희는 여전히 돌부리 같은 연기를 한다. <카트>에서도 그랬다. 원래 어른 말을 잘 안 듣나 보다. 그래서 ‘나 이제 다 컸으니까 터치하지 마’라고 말할 수 있는 걸까? 뭐든 어떤가? <카트>에서 천우희는 스스로를 조금 덜 괴롭힌다. 아닌가? 그렇게 되기를 내가 바라는 것뿐인가? 연기가 그녀에게 즐거운 일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그것은 한공주라는 소녀를 바라보는 내 막연한 희망일지도 모르겠다.

2014년 가을과 겨울에 <한공주>와 천우희에게 어떤 일이 생겼는지는 굳이 적을 필요가 없다. <한공주>와 천우희는 영화인에게 주는 거의 모든 상에 후보로 올랐고, 실제로 수상했다. 대종상영화제에서도 천우희는 여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됐다. 굉장하지 않은가? 저예산 독립영화로 대종상에 오르다니. 수상의 영광은 다른 배우의 몫이었지만. 한 달 후 12월17일 천우희는 제35회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이우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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