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가희를 다시 만나야 할 이유가 있었다. 옆에 있던 지인이 나에게 그녀를 영화감독이라고 소개했을 때 내 머릿속은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다음 영화는 언제 찍어요? 나도 연기를 하고 싶어요.” 내가 말했고 “저는 아직 감독이라고 하기에는…” 그녀가 대답했다. 내가 다시 물었다. “내가 배우로 부족한가요?” 그녀가 다른 약속 때문에 떠난 뒤에 누군가 이야기했다. “예쁘다. 내 스타일이야.” 아리송했다. 예쁜 얼굴이었나?
그게 1년 전이다. 종종 박가희가 생각날 때마다 궁금했다. 예뻤어? 그런데 왜 내가 몰랐지? 연기 욕심을 부리느라 못 알아봤나? 그때 박가희는 독립영화를 몇 편 찍고, 오타니 료헤이와 클라라가 나오는 15분짜리 스릴러 <클로젯>을 촬영한 이력을 갖고 있었다. 이 스릴러는 한 담배회사가 문화 사업의 일환으로 후원했다. “운이 좋았어요. 제가 경력이 많은 사람이 아닌데. 제 단편영화를 본 분이 추천을 하셨더라고요.” 박가희가 1시간 전에 말했다. 나는 지금, 박가희를 1년 만에 다시 만나고 돌아와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아까 느닷없이 채팅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 만나요. 인터뷰해요.” 핑곗거리가 있었다. 11월에 새 영화 <레디액션 청춘>이 개봉했으니까.
<레디액션 청춘>은 차세대 감독으로 선정된 네 명의 신인 감독이 각각 찍은 30분짜리 영화를 통칭한 제목이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의 지원을 받아 청춘과 액션을 키워드로 촬영했다. 박가희는 ‘훈련소 가는 길’을 찍었다. “논산훈련소에서 촬영을 해야 하는데, 촬영 일주일 전까지 허락을 안 해주는 거예요. 주인공이 욕하는 장면이 있거든요. 군대 가기 싫다는 말도 하고, 탈영할 거라는 말도 해요. 그러면 촬영 허가를 안 해준대요.” 군대 안 간 남자들이 충분히 할 법한 말인데 왜 허락을 안 해줬을까? 군대에서 워낙 사고가 많이 나니까? 하지만 그녀는 결국 승낙을 받아냈다. “군대 가고 싶다, 라고 말하는 걸로 시나리오를 고쳐서 다시 보냈어요. 저는 논산훈련소에서 꼭 찍고 싶었거든요. 촬영은 원래 시나리오를 대체로 유지한(따라 간) 편이에요.”
우여곡절 끝에 촬영을 마치고 개봉도 했지만 관객이 거의 들지 않았다. 애당초 청춘과 액션이라는 키워드가 웬 말인가? 아이돌을 한 명 이상 캐스팅해야 한다는 조건도 있었다. 아시아 시장에 판권을 팔기 위해서라는데, 배급사의 그런 판단이 현실적인 거였겠지? 그래도 뭐랄까, 아쉽긴 하다.
박가희가 얼마든지 더 재밌는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건 <클로젯>을 보면 안다. 유튜브에 올라와 있다. 대단한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클라라가 이런 역도 할 수 있었나? 라는 생각 정도는 든다. 그리고 박가희가 감각적인 연출이 가능한 감독이라는 판단 정도는 할 수 있다. “덕구, 죽었어요. 농약 먹어서.”라는 대사가 인상적이다.
아무튼 우리는 인터뷰를 핑계로 다시 만났고 나는 또 같은 말을 했다. “지나가는 강아지 역도 할 수 있어요.” “정말요? 그런데 사기꾼 역 어울릴 것 같아요. 여러 사람 짜증나게 하는 캐릭터도 어울릴 것 같고.” 그런데 그건 내가 인정하지 않는 진짜 내 모습이다. 저 여자가 어떻게 알았지?
박가희는 겨울이 지나면 장편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지방 어딘가로 내려갈 생각이다. 아, 글을 적는 나까지 막막해진다. 자고 일어나면 크리스토퍼 놀런이 되는 일은 생길 수 없는 걸까? 그러고 보니 ‘벼락 스타’란 말은 들어봤는데 ‘벼락 감독’이란 말은 못 들어봤다. 하지만 동작과 동작 사이, 대사와 대사 사이의 호흡을 소중하게 대하는 박가희의 능력은 겨울의 손난로처럼 따뜻하게 빛난다. 최근에 박가희가 찍은 한 화장품 브랜드의 (짧은 영화 같은) 광고를 보면 알 수 있다. 나는 그 업체에서 수분크림 한 통 받은 게 없지만 보고 웃었고 행복해졌다. 박가희를 응원한다. 사심은 있다. 헤어질 때 박가희가 말했다. “다음 영화 때 반드시 출연시켜줄게요.” 박가희는 예뻤다. 분명히 예뻤다.
이우성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