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시집을 내고 10년이 다 되어가던 때였어. 문단에 내 또래가 거의 없었거든. 있어봤자 소설 쓰는 친구들이었어. 김연수랑 이응준같이. 혼자서 외로워서 그랬나, 시 쓰는 게 별로 재미가 없었어. 이래저래 돈 버느라 바쁘기도 했고. 그런 차였는데 병승이, (김)행숙이부터 해서 (김)민정이, (김)경주 같은 후배들이 문단에 쫙 나오는데, 시를 잘 쓰더라고. 느낌이 옛날에는 그렇게 쓰면 사람들이 뭐라고 했는데, 어? 이렇게 쓰네, 얘들이? 외롭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지. 얘들이랑 놀고 싶네, 이런 생각을 했지. 그렇다면 나도 이제 더 써 보자, 그렇게 해서 시를 계속 쓰게 된 거야. 그 시인들을 만나면 사이가 좋든 안 좋든 형제 같아. 더 오래 혼자 있었으면 아예 다른 일을 해버리거나 시를 안 써버릴 수도 있었을 거야.”
강정이 다섯 번째 시집 <귀신>을 출간했다. 인터뷰를 핑계로 만났다. 나는 그를 경외한다. 그가 혼자서 10년을 버텼기 때문이다. 그는 스물두 살에 등단했다. 너무 어렸으며, 너무 낯선 시를 썼다. 저 일군의 젊은 시인들 이전에 강정이 있었다. 그들이 등장한 이후에도 강정은 있다. 그래서 강정은 편의상 짓는 어느 한 구분 속에 들어가지 못했다. “사람들이 많이 물어봤어. 당신은 너무 일찍, 그런 시를 써서 손해 본 거 아니냐고. 그런데 내가 별 욕심이 없어서 그런지 그런 생각은 안 들었어. 오 이 새끼들 봐라? 이런 거지 뭐. 신기하기도 하고.”
새 시집 <귀신>을 읽으며 새삼, 아, 이 형의 언어는 거침이 없구나, 라고 생각했다. ‘나는 미끄덩한 길의 끝에 음부를 꽂은 채/ 몸안으로 뻗치는 길의 가지들을 느낀다’(<천둥의 자취> 중에서) 같은 문장은 그의 호방함을 증명한다. “이거라도 내 마음대로 해야 할 거 아냐. 나는 시나 사는 거나 그냥 나 자신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거든. 그렇지 않으면 시를 쓰는 의미가 없는 것 같아. 시 쓰는 거는 그냥 내가 나를 풀어놓는 하나의 방법이니까.”
시집 제목인 ‘귀신’은 내가 그를 떠올릴 때마다 항상 연상되는 단어다. 그는 내가 습작생이었을 때 “반은 내가 쓰고 반은 귀신이 쓰는 거야”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그 말을 무의식을 열어두고 시를 써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귀신>을 받아들었을 때 속으로 ‘드디어’라고 말했다. 강정의 시가 드디어 여기에 닿았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나에 대해 갖는 확신들이 있는데 그걸 놔버릴 때 시가 써지는 거지. 그럴 때 나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몰라. 귀신이 나를 불러 가는 거지. 시집 원고를 정리할 무렵에 내 시를 내가 보는데 귀신이 지껄이는구나 싶었고. 그래서 처음엔 반 장난으로 편집자한테 제목을 ‘귀신’으로 하겠다고 말했는데 정말 이거 말고 다른 제목이 안 떠오르는 거야.”
<귀신>은 불완전한 시집이다. 어떤 시집이 완전하겠냐만, <귀신>은 완벽을 지향조차 하지 않는다. 시의 틀을 따르기보단, 자신의 논리와 무의식을 좇는다. 거침없다. 그래서 <귀신>은 시집을 잡아먹는다. <귀신>을 손에 쥐면 시집의 겉면이 아니라 시의 내면이 만져지는 것 같다. 물컹하면서도 깊고 속을 알 수 없는.
“그런데 시집을 낼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들어. 첫 시집 <처형극장>에서 했던 것들을 다르게 하고 있구나, 결국 옛날에 다 했었구나, 그때 뭐가 뭔지도 모른 상태에서 해버린 것들이 있었구나….”
나는 시를 쓰는 게 기쁘지 않을 때 강정을 생각한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이 시집이 생각난다. 그리고 자부심을 느낀다. 그건 동시대를 살고 있는 극소수만이 누리는 기쁨이니까. <처형극장>에서 <귀신>까지 강정의 시는 줄곧 딱딱한 바위에서 부드러운 물고기를 길어냈다. 죽음마저 아름다운 것으로 만드는 강정의 언어는 치명적이고 한편 불온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강정은 단 하나의 문학상도 받지 못한 시인이다. 그래도 언제나 당당하다. 시를 제대로 배운 적도 없고, 그저 지껄이듯 마음대로 쓴다고 했지만 그가 등단한 지 20년이 넘었다. 그와 그의 시는 시간을 견뎠다. “자신감이 있으니까 계속 쓰는 거겠지. 내가 주먹이 약하다 싶으면 다 무서워 보이잖아. 근데 반대로 주먹에 자신 있어서, 덤벼봐, 이러면 아무도 안 덤비잖아.” 누구라도 언제까지 강정을 외면할 수는 없다. 살아 있는 귀신 강정을.
이우성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