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겹살
[esc] 박미향 기자의 ‘나랑 밥 먹을래요?’
ㅇ과의 부산 1박2일…비에 절망하고 패배에 좌절했지만 먹거리로 기운 얻어
“바닷바람이나 쐬고 올까?” 선배 ㅇ이 연락을 해왔다. ㅇ과 우리 가족은 형제나 마찬가지다. 그는 느리게 걷고 말수가 적고 약속은 정확하고 착하기까지 한 엘리트였다. 생김새는 푸근하지만 검은 타협이라고는 모르는 원칙주의자다. 40대 중반 독신남이 던진 “바닷바람”에는 많은 것이 함축되어 있었다. 인생에서 가질 수 있는 것, 갖지 못할 것, 놓아버려야 할 것들을 고민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굳이 묻지 않았다. 대신 냅다 새벽 6시발 부산행 고속열차 3장을 예매했다. 우리 가족의 오랜 숙원사업은 부산 사직구장에서 롯데 자이언츠 경기를 보는 일이었다. ㅇ의 심란한 마음과 우리의 소망은 딱 맞아떨어졌다.
지난 10월22일 고속열차 안은 오로지 날씨 이야기였다. 부산에 비가 많이 올 거라는 예보에 절망했다. 야구경기가 행여 취소되면 마치 우리 인생도 덩달아 ‘취소’가 될까 싶었다. 우리 앞에는 도시락이 있었다. 오래된 콩자반, 흰 기름이 진눈깨비만큼 깔린 불고기, 수저가 들어갈 정도만 데워진 밥 덩어리들이 노려보고 있었다. 도시락은 ‘현재’가 아니라 ‘미래’를 위해 존재한다. 더 정성이 필요한 음식이다. 열차 도시락이 뚜껑을 열자마자 파릇파릇 살아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부산은 스산했다. 비는 그칠 줄 몰랐다. 경기는 취소됐고 우리는 샴고양이 털빛이 퍼진 바다로 향했다. 역시 쓸쓸했다. 풍선처럼 가벼운 농담을 던져도 옷깃을 파고드는 무거운 기운은 사라지지 않았다. 저녁만찬으로 반전을 꾀할밖에! 우울할 때 먹을거리만큼 큰 위로도 없다. 부산 중구 중앙동의 중앙식당은 제철 자연산 회가 맛난 곳이다. ㅇ에게 싱그러운 바다 향으로 위로하고 싶었다. 무학소주 ‘좋은데이’가 기분을 달뜨게 했다. ‘좋은데이’는 상갓집에는 못 들어간다고 한다. 풍문이지만 죽음을 앞에 두고 ‘좋은데이’를 마실 수는 없는 일! 중앙식당의 대구탕은 일품이다. 담백하다. ㅇ처럼 말이다. 바닷물고기인 대구는 성장이 빠르고 알을 많이 낳는다. 풍성한 놈이다. 제철 맞은 대구는 뽀얀 국물에 폭 빠져 떡하니 나타났다. 잘 익은 내장과 살점이 맛깔스러웠다. 10월의 밤은 끊어도 잘라도 늘어지는 고무줄처럼 길었다. 긴 밤을 허름한 선술집에다 바쳤다.
우리는 ‘취소’된 인생을 재건하기 위해 다음날 경기장을 찾았다. 롯데 자이언츠 이대호 삼진아웃, 에스케이 와이번스 박정권의 홈런, 한숨이 구장을 짓눌렀다. 안타까움을 치워버리려고 야구장에서만 파는 찬 족발과 말라붙은 김밥과 구단 로고가 박힌 맥주를 먹었다. 에스케이 와이번스가 이겼다.
구포역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여전히 차고 매서웠다. 역 앞 포장마차 만두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두꺼운 피에 만두 속은 당면만 있는 싼 만두. “한 개는 보너스라.” 할머니의 인심이 후하다. 한국전쟁 때 피난민들을 위로했던 구포국수를 한 젓가락 할 만도 한데 정작 찾아들어간 집은 돼지고기구이 집이었다. 서울에서 한때 고깃집마다 유행했던 두툼한 삼겹살이 아니라 적당한 두께의 삼겹살(사진)이 나왔다. “우리 고기 맛나예. 축협에서 좋은 것만 가져와예.” 주인장은 당당했다. 그의 고기는 큰 격려가 되었다.(중앙식당 051-246-1129)
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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