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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열대어와 더불어 성장하다

등록 2011-02-17 09:59수정 2011-02-17 10:53

26년간 열대어를 길러온 한강훈씨
26년간 열대어를 길러온 한강훈씨
[매거진 esc] 판타스틱 덕후백서
‘물생활’ 26년 여행가이드 한강훈씨
‘물생활’을 아시나요? 생소한 분들을 위한 힌트 하나. 문 앞이나 문방구 등에서 운명적으로 만남 → 가족(주로 엄마)의 눈초리 → 24시간 먹을거리·관심 제공 → 시름시름 앓다 끝내 하늘나라로.

누구나 한번쯤 경험했음직한 이 애틋한 사연의 주인공은 주로 병아리나 금붕어다. 언뜻 생소한 물생활은 이런 익숙한 풍경의 다른 말이다. 눈치채셨는가. 물생활은 수중 동식물 키우기를 뜻하는 인터넷 용어다. 여행가이드인 한강훈(41)씨는 벌써 26년간 200여종의 열대어를 길러온 ‘고수’ 물생활자다. 집도 인천에 있고 이름에도 ‘강’이 들어가니 물과는 뗄 수 없는 인연인 것일까. 전용면적 80㎡대(30평대)의 그의 집에는 6자(전면 가로길이가 180㎝)짜리 어항을 비롯해 20여개가 놓여 있고, 그 안에 열대어 20여종이 노닐고 있다. “열대어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져요. 어릴 때 동물 좋아하지 않는 사람 거의 없다고요. 그 기억이 남아 있는 거죠. 이게 또 중독성이 있어요. 물생활 2년쯤 하다 접는 사람 숱하게 봤지만 방을 어항으로 다 꾸며놓는 사람도 많이 봤죠.”

네온블루슈퍼화이트구피
네온블루슈퍼화이트구피

아버지 사업 실패로 남의 집 셋방살이가 시작됐을 때, 그는 사춘기 소년이었다. 주인집 거실에는 커다란 어항과 무선 모형비행기가 있었다. 소년은 여느 남자애들처럼 모형비행기가 탐났다. 다만 어항 유리에 비친 모형비행기를 넋놓고 봤을 뿐이다. 이 모습을 잘못 본(?) 어머니는 소년이 안쓰러웠는지 청거북 두마리를 선물한다. 소년을 열대어의 세계로 안내한 것이 이 두마리 청거북이었다. 소년은 먹이를 사러 수족관을 드나들다 열대어에 마음을 빼앗겨 자신만의 어항을 가꾸기 시작했다. 가장 싸게 살 수 있는 ‘구피’(guppy)가 첫 친구였다. 어른이 된 뒤에도 구피와의 인연은 계속되는데, 애호가들 사이에 ‘물생활은 구피로 시작해 구피로 끝난다’는 말이 있다고. 구피는 번식이 쉽고 세대가 짧아 전세계 육종가들이 이 구피를 개량해 새로운 종을 만들어낸다. 국내에서도 품종을 개량해 유료로 분양하는 이들이 있다. 동호회 ‘구피사랑모임’에서는 해마다 우수 구피를 가리는 대회를 열기도 한다.

모형비행기 대신 ‘구피’를 만나다

소년이 열대어에서 ‘건담 마니아가 남들에겐 없는 건담을 발견한 것 같은 기쁨’을 느끼기까지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구피 이후에 그의 자그마한 어항 속에 사다 넣은 ‘블루아카라’가 번식을 해낸 것이다. 무에서 유를 창출하는 그 감격이라니. 그 이후 “졸업선물 뭐 사줄까”란 물음에 소년의 답은 항상 “열대어”였다.

성인이 된 한씨는 책이나 티브이에서만 볼 수 있던 새로운 품종의 열대어 기르기에 본격적으로 나선다. “‘구피’는 뱃속에서 알을 부화시킨 뒤에 새끼를 낳는데, ‘시클리드’는 암컷이 알을 화분이나 돌멩이 등에 붙이고 수컷이 수정을 해요. 그리고 자기들이 알을 돌보는데 그걸 보는 게 너무 재밌는 거예요.” 그가 기르면서 가장 큰 감동을 받은 열대어는 ‘이집션 마우스브리더’였다. 암컷이 수정란을 입속에서 부화시키는 종으로 주변에 포식자들이 나타나면 새끼들을 입 안에 넣어 보호한다. 반면 ‘열대어의 황제’로 꼽히는 ‘디스커스’를 기르다 처절한 번식 실패도 맛보았다. 디스커스는 새끼에게 젖을 먹이는 것처럼 피부의 점액을 먹이는 종으로 기르기가 상당히 까다롭다. 새끼가 제법 자라 몸담고 있던 동호회에서 분양을 기다리던 이들도 많았다. 그러던 어느날 아침에 불을 켜보니 새끼가 한마리도 없었다. 예민해진 어미가 다 잡아먹어버린 것이다.


그가 직접 기른 줄리도크로미스 딕펠디
그가 직접 기른 줄리도크로미스 딕펠디

물생활을 하다 보면 손톱에 때 낄 날이 없다. 집에 아이들이 있으니 어항 만진 손을 깨끗이 씻어야 한다. 열대어에 해가 될까 싶어 화장품도 잘 안 바른다. 6년 전 6자 어항이 들어올 때가 물생활의 절정이었다. 6자 어항을 꾸미는 데는 200만원 정도가 든다. 당시엔 기르고 싶은 어종이 보이면 카드를 긁고 또 긁었다. 매달 전기료가 30만원까지 나오던 때였다. 사실 여행업계에 발을 디딘 것도 열대어와 무관하지 않다. “원래는 3일 정도 나가다 그만두려 했는데 회사에 계신 분이 계속 이 일을 하면 전세계 수족관 다 볼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근데 뭐, 일은 일이라 제대로 구경한 적은 없어요.”

어항이 많은 물생활자들은 간혹 비가 오지 않아도 물난리를 겪는다. 한씨 역시 마찬가지다. 웬만한 재난은 아내 모르게 은밀히 처리했지만 2009년 12월 대재앙(?)은 바닥에 제법 물이 고여 발을 움직일 때마다 첨벙첨벙 소리가 날 정도였다. 먹이용으로 쓸 ‘브라인슈림프’를 부화시키기 위해 물통에 물을 채우다 잠그는 것을 깜빡한 것이다. 신문 10부, 걸레 8장을 활용한 1시간여의 작업 끝에 복구를 마칠 수 있었다. 크고 작은 재난을 겪은 끝에 얻은 교훈은 대략 이렇다. ‘물이 넘쳤을 때 감전사고에 유의할 것. 쓰레받기로 물을 퍼 옮긴 뒤 걸레로 빡빡 닦고 남은 물방울은 신문지로 제거하기.’

마른하늘에도 빈번한 물난리

한씨는 중학교 때 산 <열대어 사육과 번식>이란 책을 여전히 갖고 있다. 지금은 색이 바래고 너덜너덜해진 상태지만 버릴 수가 없다. 한편으로는 최신 어종과 번식 정보에 늘 목마르다. 일본 등 외국 사이트에 나온 정보를 번역기에 돌려서 보기도 했다. 그러다 6년 전부터 블로그(blog.naver.com/huni0205)를 시작했다. “물생활 에피소드를 재미나게 써서 사람들에게 관심을 유발하고 싶어요. 번식 정보를 잘 쌓아놓으면 일본 마니아들도 제 블로그에 들어오지 않겠어요?”

다수의 열대어를 황천길로 보낸 물생활 입문자들이 가장 신경써야 하는 건 ‘물잡기’(어항 안에 자연정화 환경을 구축하는 것)란다. “마트에서 사온 구피를 수돗물에 넣으면 죽죠. 죽는 이유는 물 안에서 얘네가 응가를 하잖아요. 그러면 암모니아가 나와서 그게 쌓이다 보면 결국 질식해요. 그러기 전에 암모니아를 분해시키는 박테리아가 있어야 하는데, 이 박테리아에서는 또 아질산이 배출돼요. 이것까지도 열대어에게 해롭죠. 이를 분해하는 박테리아가 또 필요해요. 그런 환경을 만들어주는 게 물잡기입니다. 물이 잡히면 수정처럼 맑아져요.” 물을 잡은 다음엔 열대어가 살던 환경에 맞게 산성도(pH)를 조절해줘야 한다. 한씨는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살아 숨쉬는 생물에 대한 ‘책임감’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올해 ‘콰트로 프로젝트’ 실행을 선언했다. 콰트로란 이탈리아어로 4를 의미하는데 ‘초콜릿구라미’ 등 4가지 어종을 기르겠단 의미다. “원래 4대 프로젝트라고 불렀는데 4대강 사업이랑 어감이 비슷해서 바꿨어요. 물생활인데 영 찝찝해서….” 이제 웬만한 열대어를 다 키워본 만큼 번식정보가 잘 알려지지 않은 어종 기르기에 도전하는 것이다. “주위에선 농담으로 열대어 장사 하라고도 하지만 그렇게는 안 할 거예요. 이렇게 취미로 기르면서 번식 분야에서 알아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물생활 용어사전

물생활자들이 쓰는 용어들은 디시인사이드 용어 못지않다. 한강훈씨에게 조언을 얻어 몇가지만 추려봤다.

별이 된다 | 사망하다. 대다수 열대어가 변기에서 죽음을 맞이하기에 미안한 마음을 담아 쓰는 말. 유사어는 용궁 간다.

레이아웃 | 어항 내부를 수초나 돌 등으로 세팅하는 것.

냉짱 | 모기 유충인 장구벌레를 얼린 것. 열대어 먹이.

냉미 | 냉장 미꾸라지로 대형어 먹이.

폭탄맞다 | 자연정화 순환이 깨지거나 질병이 옮겨지는 등의 원인으로 어류들이 몰살당하는 경우.

호빵(또는 호떡) | 빵빵하게 생긴 디스커스 종을 이르는 말

글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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