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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긋한 선물, 사찰음식

등록 2010-09-30 10:22

향긋한 선물, 사찰음식. 한겨레 박미향 기자
향긋한 선물, 사찰음식. 한겨레 박미향 기자
[매거진 esc] 박미향 기자의 ‘나랑 밥 먹을래요?’
그가 떠났다. 떠나는 뒷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저 “밥 한끼 먹자”는 소리가 이별을 고하는 소리인지 몰랐다. 엘(L)은 한국을 떠나는 자신의 선택을 친구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덜컹 심장이 내려앉았다. 평생 곁에서 우정을 쌓고 지낼 줄 알았던 친구가 느닷없이 사라져버렸다. “밥 한끼” 못 먹은 비애감이 장희빈의 탕약 같다. 그는 차가운 껍질을 벗기고 나면 따스한 감촉을 선물하는 멍게 같은 놈이다. 차가운 머리, 따스한 심장을 가진 이라고나 할까! 나 같은 사람이 접근할 수 없는 인간성을 가지고 있다. 인생의 구비 때마다 그의 선택은 언제나 놀라웠다. 이번에도 역시 그런 것이었다.

그는 결혼할 때 아내와 한 가지 약속을 했다. 아내가 언젠가 자신의 일에 매진해야 할 때가 오면 엘이 가정살림을 하고, 아이들을 키워주기로. 그때가 오고 만 것이다. 그는 그럴싸한 회사를 그만두었다. 친구들은 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했다. 아내는 싱가포르에서 일을 시작했다.

해마다 이별한 날이 돌아오면 ‘밥’ 생각이 난다. 밥 한끼 먹여 보내야 했는데! 거창한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온갖 기교로 포장한 섬세한 ‘밥’, 밥 사이에 틈을 만들어 부드러움을 더하고 큰 생선조각을 얹은 초밥 장인의 ‘밥’, 아니다. 돈만 있으면 선물할 수 있는 ‘밥’은 안 된다.

그때 떠오른 ‘밥’은 서울 성북구 작은 암자의 비구니 스님의 사찰음식이었다. 집된장으로 무친 나물은 신혼집의 안방처럼 고소한 향을 내고, 배와 갯나물을 함께 버무린 무침은 알싸하니 봄날 낭만이었다.

사찰음식이 ‘핫(HOT)한 요리 아이템’으로 떠오른 지는 오래되었다. 그 인기는 여전하다. 사찰음식으로 유명한 스님들은 스타 못지않다. ‘4인 4색’으로 유명한 스님들의 활약상은 대단하다. 하지만 암자의 비구니 스님은 나서기를 싫어한다. 공양간에서 음식을 만들고 있으면 불자들이 한마디씩 한다. “스님 솜씨가 너무 아깝습니다. 책도 내고 방송도 하세요.” 그는 자신의 길을 갈 뿐이다. 엘과 닮았다. 그분의 맛을 엘에게 선물하고 싶다.

박미향 기자의 ‘나랑 밥 먹을래요?’
박미향 기자의 ‘나랑 밥 먹을래요?’

우리나라에서만 맛볼 수 있는 음식이 사찰음식이다. 오신채(파, 마늘, 달래, 부추, 흥거)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상식이다. 양념은 주로 자연에서 얻은 재료로 낸다. 짠맛은 장으로, 단맛은 꿀이나 홍시로 낸다.

그저 소박하기만 할 것 같은 사찰음식도 엄청난 전성기가 있었다. 불교가 흥했던 고려시대 초·중반에는 임금도 고기를 먹지 않았다. 사찰음식은 일반음식보다 더 화려하고 복잡한 기교를 부렸다.


사찰마다 소문난 맛 솜씨가 있다. 지리산 대원사는 초피잎장아찌와 머위장아찌, 문경 김룡사는 가죽장아찌 등등. 그가 돌아올까? 오면 그과 그의 아내를 차에 태워 전국 사찰음식 여행을 해 볼 생각이다. 우리 가족도 함께.(내 인생도 좀 챙겨야 하니!) (사찰전문음식점 ‘발우공양’. 대안 스님이 주방을 책임지고 있다. (02)2031-2081. 예약을 하지 않으면 자리가 없다.)

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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