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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분한 흑백톤에 비친 분단의 흔적들

등록 2010-08-04 19:02수정 2010-08-08 09:35

‘매향리 풍경, 1999’.
‘매향리 풍경, 1999’.
[매거진 esc] 한국의 사진가들
사진가 강용석씨, 동두천·매향리·한국전쟁기념비 포착
“교수님 검색순위 1위예요.” 한 통의 전화가 사진가 강용석(52·백제대 사진학과 교수)에게 걸려왔다. ‘2010 동강사진상’ 수상자로 강씨가 발표된 직후였다. 강씨는 “동강사진상이 그렇게 사람들에게 관심거리였나!” 의아했다. 인터넷을 후끈 달군 그의 이름은 ‘그’가 아니었다. 검색순위 1위는 자신과 동명이인인 한나라당 강용석 의원이었다. 강씨는 “내참, 한자도 같아요”라며 웃는다.

사진가 강용석(52·백제대 사진학과 교수)
사진가 강용석(52·백제대 사진학과 교수)

사진가 강용석은 정치인 강용석과 많이 다르다. 그는 20대부터 한국 사회의 문제를 집요하게 고민해온 다큐멘터리 사진가이다.

그가 끈덕지게 물고 늘어진 우리의 문제는 ‘한국전쟁 이후 분단 상황’이었다. 분단을 다룬 사진가는 많다. 하지만 그들과는 조금 달랐다. 그의 사진은 쉽게 몰입이 되지 않는다. 출렁거리는 감정의 파고가 생기지 않는다. 처절한 분단의 비애도, 공포도 오지 않는다.

그저 한동안 빤히 쳐다보게 될 뿐이다. 그러고 나면 ‘나니아’를 방문한 루시처럼 희한한 경험이 찾아온다. 내장 깊숙한 곳에서부터 옅은 감정이 새벽녘 안개처럼 솟아오른다. 어색하고 어긋나 보이는 피사체들이 우리에게 말을 걸기 시작한다. ‘우리 현실의 뿌리 깊은 문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해?’, ‘우리의 비극은 어디서 출발한 거지?’ 이성적인 질문들이 쏟아진다. 이제는 익숙해져 버리기까지 한 분단의 비극이 조금씩 고개를 들고 내 안에 들어오는 듯하다. 오랫동안 감상해야 가능한 일이다.

‘선전촌 사진 2000~2006’. 선천촌은 북한에서 바라다 보이는 지역에 선진국형 주택을 지워 전시효과를 노리는 마을이다.
‘선전촌 사진 2000~2006’. 선천촌은 북한에서 바라다 보이는 지역에 선진국형 주택을 지워 전시효과를 노리는 마을이다.

감정적 몰입 대신 이성적 질문이 이어지는 사진들

그의 작품에서 이런 식의 이성적 몰입이 가능한 이유는 독특한 흑백의 톤 때문이다. 그의 흑백사진은 콘트라스트가 강하지 않다. 흑과 백의 농도는 거의 몇 퍼센트 차이가 안 난다. 사진계에서는 이런 사진을 ‘플랫(flat)하다’고 한다. 강렬하지 않고 밋밋하기까지 하다. 보는 이들이 빠져드는 데 시간이 걸린다. 강씨가 이런 사진표현 형식을 취하는 이유는 “(대상과 사회문제에) 일정 정도 거리두기가 가능한 흑백사진 인화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냉철하게 봐야 합니다. 대상에 취하는 것을 원하지 않아요”라고 말한다. 다큐멘터리 사진가로서 객관성을 담보하기 위해 그가 취한 기법이다. “이성적 태도와 관조적 시각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그의 사진에는 클로즈업 사진도 별로 없다.


그는 어떤 피사체를 찍느냐도 중요하지만 그 피사체를 담아내는 형식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어떤 형식을 취하느냐가 대상을 바라보는 태도를 결정합니다. 35㎜ 카메라를 드는 이와 대형카메라(4×5인치 필름을 사용하는 카메라)를 드는 이는 분명 다르죠. 형식이 의미를 규정하기도 합니다.” 그의 사진 톤은 글의 형식과 같다.

‘동두천 기념사진, 1984’.
‘동두천 기념사진, 1984’.
‘한국전쟁 기념비’ 강원도 춘천시 근화동 춘천대첩기념 평화공원, 2007.
‘한국전쟁 기념비’ 강원도 춘천시 근화동 춘천대첩기념 평화공원, 2007.

그가 처음 분단 문제에 관심을 가진 것은 1980년대 사회상황과 닿아 있다. “젊은이들이 모두 민주화운동에 관심을 가졌죠. 독재에서 벗어나기 위해, 저 역시 그중 한 명(중앙대 사진학과 77학번)이었어요.” 그는 동무들이 거리의 시위 현장에서 카메라를 들 때 미군 클럽가로 향했다. 이태원, 동두천 등. 그는 그곳에서 사회적,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외국여행도 힘든 시절”에 외국인들이 집단으로 몰려다니는 풍경은 그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는 84년 동두천 보산리에 있는 미군 클럽가로 “사진을 찍기 위해” 들어갔다. “홀이나 바에 들어가서 사진 찍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었죠.” 무시무시한 주인들이 도끼눈을 하고 있었고 자칫하면 맞거나 카메라를 빼앗기고 쫓겨나기 딱이었다. ‘내국인 출입을 금함’이라는 경고판도 붙어 있다.

준영내였던 클럽가를 드나들 수 있는 내국인은 오직 ‘동두천 사진사’뿐이었다. ‘동두천 사진사’는 미군들의 기념사진을 찍어주고 돈을 버는 사람들이었다. 그들만의 카르텔이 있었다. “2~3㎞ 되는 거리에 3분의 2는 백인들 거리, 3분의 1은 흑인들 거리로 형성되어 있었는데 백인들 거리는 돈을 제법 벌었어요. 흑인들 거리는 밀려난 사진사들이나 나이가 든 사진사들이 일했지요.” 그는 삼촌뻘 되는 사진사들을 설득해서 흑인들 거리에서 일하는 사진사가 되었다. 1년 동안 그곳에서 살았다. 그의 사진 속에는 무표정한 흑인과 커다란 파마머리를 한 한국 여인들이 섬뜩하게 앉아 있다. 기괴하고 슬프다.

‘동두천 사진가’가 되어 미국 클럽가 돌기도

이후 그는 미국 오하이오대학에서 사진을 공부했다. 그곳에서 지금의 흑백사진을 배웠다. “앤설 애덤스와 함께 흑백사진을 연구한 아널드 개슨(Arnold Gassan)의 제자가 수업을 했어요. 그분께 현상조절, 인화방법 등 체계적인 수업을 받았지요.” 수업 내용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아널드 개슨의 <흑백사진 만들기>도 번역했다.

1991년 한국에 돌아와서 한동안 사보제작업체나 잡지사에서 일을 했다. “은행 안내서를 많이 찍었는데” 우습게도 “아이엠에프가 터지고 나자 자신이 찍은 은행장들이 모두 잡혀”가더란다.

99년부터는 서해안 작은 마을, 매향리를 찾았다. ‘분단작업’을 이어간 것이다. 그의 카메라는 봄의 매향리만을 담았다. 사계절 모두 작업했지만 자신이 원하는 톤은 봄에만 가능했다. 그는 그곳에서 공포를 체험했다. 영화 <미스트>처럼 공기를 통해 전해지는 바늘 같은 공포였다. “비행기가 지나가는데 굉음이 엄청났죠. 공기의 흔들림, 떨림이 공포로 다가왔습니다. 육안으로 보이는 비행기는 큰 그림자를 드리웠죠. 그러고 나면 너무나 짙은 고요가 찾아옵니다.” 한순간 찾아오는 공포와 고요를 자신의 사진에 담았다. 그는 주민들은 찍지 않았다. 그것은 “많은 매체에서 다뤘고” 자신이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지형과 풍경을 감싸고 있는 매향리 공기”가 피사체였다.

이 사진들은 2003년 미국 뉴욕 휘트니미술관에서 열린 그룹전 ‘디 아메리카 이펙트’에 초청되었다. 이 전시는 9·11 사건 이후 미국 밖에서 ‘미국을 바라보는 시선’을 모아 연 전시였다. 미국을 제외한 전세계의 예술가 20여명이 초청되었다. ‘매향리 풍경’은 현재 국립현대미술관과 서울시립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장애아 작업. 1982.
장애아 작업. 1982.
장애아 작업. 1982.
장애아 작업. 1982.

2000년대에 찍은 ‘민통선 풍경’이나 ‘선전촌 사진’도 분단의 현실을 차분하게 다루고 있다. ‘선전촌 사진’은 1973년도에 만들어진 철원군의 선전촌을 찍은 것이다. 그는 작업을 하면서 주민들의 영정사진과 가족사진을 무료로 찍어주었다. 1달에 한두번 꼬박 6년간 다녔다. 지금 그곳엔 50여가구만 남아 있다고 한다.

최근 작품 ‘한국전쟁 기념비’는 국토에 새겨진 분단의 흔적을 다룬 사진들이다. “군사정권 때 반공 이데올로기를 위해 집중적으로 만들었던 거대한 전쟁기념비가 지금은 초라하게 버려져 있거나 아무도 찾지 않는 것이 되었어요.” 그는 3년 동안 전국을 다녔다. 과거 이데올로기 시절의 모습과 현재의 일상을 함께 프레임에 넣어 미세하게 충돌하는 우리 문제를 그려냈다. 현재 그는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집단학살 현장에 대한 작업을 준비중이다.

그의 작품은 오는 22일까지 강원도 영월에서 열리는 ‘2010 동강국제사진제’의 ‘동강사진상 수상자전-강용석’ 코너에서 만나볼 수 있다.

글 박미향 기자 mh@hani.co.kr·사진제공 강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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