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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남자와 족발을 뜯다

등록 2010-07-14 19:33

세 남자와 족발을 뜯다. 박미향 기자
세 남자와 족발을 뜯다. 박미향 기자
[매거진 esc] 박미향 기자의 ‘나랑 밥 먹을래요?’
20분을 기다렸다. 20분쯤이야! 곧 맛볼 족발을 생각하면 그저 영화 예고편을 보는 것처럼 즐겁기만 한 시간이었다. 더구나 내 곁에는 훤칠한 남자가 세 명이나 있었다.(내가 ‘아기 바구니’도 아닌데 세 남자와 하룻밤 나들이를 시작하다니!)

영화감독, 사진가와 요리사. 40대, 30대, 20대인 이 남자들의 공통점은 모두 소박한 미식가들이란 점이다. 이들이 주로 찾아다니는 맛집은 방송을 거의 타지 않는 ‘무명의 스타’들이다.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가지 않으면 찾기 힘들고 가격은 ‘착하디착하다’. 영화감독은 이미 그 판에서 소문이 자자한 음식 애호가다. 그날 밤 우리가 찾은 족발집 ‘와글와글족발’도 그의 인도하심의 영광을 입은 곳이다. 영화감독은 어딘가 차갑고 댄디한 느낌의 남자다. 영화 <태양은 가득히>의 알랭 들롱처럼 잘생긴 외모가 묘하게 애처롭고 안쓰러운 느낌을 준다. 이 세련된 남자가 족발을 뜯는다.

우리가 앉은 식탁은 거의 기절초풍할 정도로 좁았다. 세 남자와 거의 무릎이 닿을 정도이고, 술잔을 따르는 감독의 솜털이 느껴지기까지 했다.(아찔!) 하지만 곧 등장한 푸짐한 족발 때문에 사람을 들뜨게 하는 이런 고통은 안중에도 없이 사라졌다. 우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곧 “으음!” 탄성이 이어졌다. “껍질이 쫄깃쫄깃하네요. 살은 부드럽네요.” 요리사의 칭찬이 이어졌다. 갈색의 쫀득한 껍질을 맛보고 나자 희고 부드러운 지방이 나타났다. 살코기는 뚝심 있는 사내였다. 어떤 향으로도 치장하지 않았다. 족발집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질이 떨어지는 고기를 쓰는 집들이 때로 강한 향을 고기에 입힌다. 고기의 결점을 보완하려는 음흉한 속셈이다.

족발집 ‘와글와글족발’은 1975년에 문을 열었다. 현재 40대 후반의 주인이 2대를 이어가고 있다. 주인장은 “방송국에서 연락이 많이 오는데 절대 안 합니다. 부모님이 반대하셔요”라고 말한다. 이유는 “손님이 많이 몰리면 대량 생산을 해야 하는데 같은 맛을 유지할 자신이 없다”였다. 이 집은 매일 약 100개의 족발을 삶는다. 그날 준비한 족발이 떨어지면 문을 닫는다. 족발을 다듬는 시간만도 3시간, 삶은 후에는 냉장고에 넣지 않는다. 고기의 뜨거운 숨결은 선풍기에 식히고 살짝 온기가 있을 때 손님상에 낸다. 이렇다 보니 하루 3번 삶는다. 주인장은 족발을 가져오는 농장과 삶는 법은 비밀이라고 ‘쉿’ 소리를 내며 입을 닫는다.

요리사의 혀를 사로잡은 맛이다. 요리사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요리 현장’에 뛰어든 이다. 올해 30살. 한국의 서양 레스토랑에서 일을 하고 프랑스로 날아갔다. ‘르 코르동 블뢰’ 같은 유명한 요리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현장’에서 살고 ‘현장’에서 죽고 싶었다. 4년 동안 ‘랑브루아지’(ㅣ’ambroisie), ‘아스트랑스’(astrance) 같은 미슐랭 별점을 받은 레스토랑 열 곳에서 인턴으로 ‘굴렀다’. 문전박대하는 스타 요리사에게 열 번 이상 찾아가서 울며 일하게 해달라고 졸랐다. 동양인을 얕잡아 보는 무시무시한 요리사들과 주먹다짐도 했다. 희고 고운 손가락, 여린 듯 강해 보이는 요리사의 얼굴에서 음식에 대한 열정이 느껴졌다.

박미향 기자의 ‘나랑 밥 먹을래요?’
박미향 기자의 ‘나랑 밥 먹을래요?’

밤은 깊어가고 영화감독이 제조한 폭탄주의 맛도 짙어갔다. 요리사는 “감독님이 이렇게 많이 마시는 것은 처음 봐요”라고 말을 잇는다. 영화감독은 넉 잔 이상 술을 못 마신다. 이 남자들을 만나게 해준 이는 사진가다. 사진가와의 인연은 다음주에. 그리고 우리가 술을 깨기 위해 찾아간 집의 놀라운 맛도 다음주에.(‘와글와글족발’ 영업시간 오후 3~11시. 서울 종로구 창신동. 일요일은 쉰다. 02-765-0319)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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