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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esc를 누르며
저는 옷과 장신구에 도통 관심이 없습니다. 싱글옷장에 옷이 절반 정도 채워져 있는 정도이다 보니 “너는 교복 입고 다니냐?”는 질문도 심심치 않게 듣습니다. 신발도 한켤레 사서 3년 정도 신다가 바닥이 심하게 닳아서 미끄러져서 뇌진탕을 당할 뻔한 위기를 겪으면 다시 하나 사는 수준입니다. 귀고리나 목걸이는 당연히 없고 반지는 결혼반지조차 사지 않았습니다. 나를 꾸미지 않는다고 설마 집을 꾸미겠습니까? 집에 놀러온 사람들은 “너네 집 이사 가냐?” 아니면 “어제 이사 왔냐?” 할 정도로 가구도 없고 벽에 사진도 한장 걸려 있지 않은 휑뎅그렁한 상태입니다.
그런 제가 유일하게 돈을 ‘지르는’ 것이 있으니 그건 바로 요리도구. 요리하는 것보다 요리책 읽는 것을 더 좋아하고, 요리하는 것보다 요리도구 사는 걸 더 좋아하다 보니 집에는 요리책과 요리도구들이 범람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말에도 거금을 들여 스테인리스 냄비 5종 세트를 샀습니다. 위화감을 조성할 거 같아서 금액은 밝히지 않겠습니다. 사실 누군가에겐 한달 월급에 버금가는 금액이어서 1년을 고민하고 매장에 드나들길 수십차례. 매장 직원과 안면을 터서 평소 세일가격보다도 싸게 샀습니다만, 사기 전에 남편과 주변 동료에게 “인간이 양심적으로 과연 냄비 사는 데 이런 돈을 써도 되냐”고 여러 차례 자문을 구하기도 했습니다. 벽지에 곰팡이가 슬어도 절대 도배를 새로 하지 않는 저에게 누군가는 “뭐 다른 데 돈을 안 쓰니깐 그래도 돼”라고 지지해 주기도 했고 누군가는 “야, 그 돈으로 차라리 도배를 해라”라고 충고하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저 같은 요리도구 마니아를 위해 준비했습니다. 냉동고부터 파니니그릴까지 무슨 전자대리점을 방불케 하는 요리도구를 갖추고 살며 이에 대한 날카로운 비평으로 세간의 이목을 끈 바 있는 김혜경 82쿡 대표의 요리도구 칼럼이 이번호부터 시작됩니다. 자, 만나보시죠.
김아리 〈esc〉 팀장 a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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