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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esc를 누르며
한동안 〈TV 동물농장〉의 열혈 팬이었습니다. 말기 공주병 환자견 웅자, 살과 전쟁을 벌이던 우탄이 등 〈TV 동물농장〉이 배출한 ‘스타’도 많았지요.
하지만 저의 심금을 울렸던 건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어떤 호랑이였습니다. 동남아시아 어딘가에 사는 이 호랑이는 아기 때 부모를 잃었는지 인간의 손에서 자랐습니다. 그래도 야수는 야수, 생후 1년이 채 안 됐지만 장대한 기골에 포효라도 한번 하면 주변 사람들이 오줌을 지릴 정도로 거친 맹수의 자태가 빛나더군요.
그런 그에게도 말 못할 고민이 있었으니 엄청나게 소심한 겁쟁이라는 거죠. 그 듬직하고 거친 모습으로 누군가 다가오거나 조금 장난만 쳐도 움찔움찔 놀라며 주인의 발 뒤쪽으로 쓰윽 숨는-자기보다 작은 사람 뒤에 숨어서 어쩌라구-이 모습은 대체 뭔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인가. 아무튼 포복절도할 풍경이었죠.
그 호랑이에게 열렬하게 감정이입을 했던 저는 맹수로 산다는 것의 고달픔을 숙고하는 데 이르렀습니다.
<오즈의 마법사>의 사자도 그랬지만 용기 없는 용맹의 대명사로 사는 건 진짜 괴롭지 않았을까요. 이 호랑이를 정글로 돌려보내고자 온갖 적응 훈련을 하는데 어쩐지 이 호랑이 몹시 억울했을 것 같았어요. 인상 더러운 게 죄야? 궁시렁거리지 않을까 궁금했습니다.
물론 순전히 상상의 나래를 편 것이었지만 이번에 라이거 이야기를 보면서 그 호랑이 생각이 났습니다. 자연의 법칙이 지배하는 동물의 세계에 순전히 인간의 흥미로 태어나 내던져진 라이거들은 몹시 외롭지 않았을까요? 사람 보기야 희한하면서도 엇비슷하지만, 사자들 사이에서도 불안하고 호랑이 옆에 가기에도 어색했을 그들은 한술 더 떠 맹수 중의 맹수 연기를 해야 했으니 얼마나 고달팠을까 싶습니다. 이제 사람들의 흥미도 시들해져서 이제는 라이거를 만들어내지 않는다니 차라리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더불어 심약한 그 호랑이는 정글에 무사 귀환했을지 궁금해집니다.
김은형 〈esc〉 팀장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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