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Esc] 한국의 사진가들
한국에서 가장 비싼 상업사진 찍는 준초이, 이제 인간과 그 흔적을 찾는다
한국에서 가장 비싼 상업사진 찍는 준초이, 이제 인간과 그 흔적을 찾는다
“최! 커피 나간다.”, “최! 손님이 부른다.” 한국인 최는 오후 5시가 되면 어김없이 뉴욕 75번가 레스토랑에 나타나 접시를 나른다. 키는 작고 몸은 말랐지만 날랜 것으로 치자면 세계 일등이다. 오늘도 그는 눈을 두리번거리면서 찾는다. ‘오늘은 오려나?’ 그는 한 남자를 기다린다. 사진가 리처드 아베든(뉴욕을 무대로 활동한 세계적인 패션 사진가. 2004년 타계)이다. 최가 일하는 레스토랑은 리처드 아베든이 자주 찾는 곳이다. 최는 여러 번 그의 스튜디오에 찾아가 이력서를 내밀었지만 기다리라는 말만 듣고 돌아오곤 했다. 이미 세계 곳곳에서 몰려든 사진가들이 대가 앞에 있었다. 최는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는 레스토랑에서 일하면서 만날 기회를 잡을 생각이었다.
뉴욕이라는 정글에서 생존을 배워
‘한국인 최’는 누구일까? 한국에서 가장 비싼 사진을 찍는 사진가 ‘준초이’(최명준·55)였다. 준초이의 사진 인생을 엿보면, 열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는다. 그를 인생의 긴 줄다리기에서 포기하지 않고 삶을 밀고 당기게 한 것은 열정이었다.
그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창업을 했으나 그저 유학 가고 싶은 열정 하나만으로 국내 대학에 입학했다. 졸업후 사진학과가 유명했던 일본대학교 예술학부를 가고 싶었으나 유학 자체가 힘든 1970년대, 성적도 우수하지 않은 처지에 어려운 일이었다. 무작정 부딪쳐 본다는 생각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사진 전문학교를 다니면서 문을 두드렸다. 냉담한 반응뿐이었다. 무작정 학장과 담판을 할 셈으로 찾아간 그곳에서 뜻하지 않은 은인을 만나 입학했고, 4년 내내 장학금을 받으면서 일본인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점수 잘 받는 훈련을 한 것뿐, 공부를 한 것이 아니다. 돈이 없었기에 장학금은 내게 중요했다.” 졸업할 때쯤 교수자리를 내미는 국내 학교들도 여럿 있었지만 그의 열정은 안락한 캠퍼스에 머물지 않았다. 결국 현대미술의 중심이자 최고의 상업 사진가와 예술 사진가가 모이는 뉴욕으로 향한다.
영화 <스텝맘>을 보면 사진가 줄리아 로버츠가 셔터를 누르기 전에 수많은 ‘포토 어시스트’들이 완벽한 세트와 조명을 준비한다. 뉴욕의 사진 스튜디오는 그처럼 분업화되어 있고 거대하다. 어시스트만 전문으로 하는 직업도 있다. 뉴욕의 사진가가 찍는 이미지는 바로 현대인들의 아이콘이 된다. 그곳은 이미지를 창조하고 싶은 모든 사진가들의 전쟁터이며 정글이다. 그곳에 준초이는 뛰어들었다. 그는 리처드 아베든 스튜디오는 아니지만 패션사진가 오먼드 기글리와 정물사진가 제럴드 자넷의 스튜디오에서 일했다. 힘들었다. 돈도 없었다. 말도 잘 통하지 않았다. 금요일 오후면 구토하는 병이 생길 정도로 그 정글은 참혹했다. 하지만 열정이 있었다. 미국인들 사이에서 부지런하고 일 잘하는 ‘초이’로 통하면서 자신만의 스튜디오를 열었다. 그곳에서 생존과 경쟁을 배웠다. 88년 한국에 돌아와 <준초이 비주얼>을 설립했다. 미국 사진가 친구들은 올림픽이 열리는 고국에서 할일이 더 많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그 충고는 맞아떨어졌다. 그의 상업사진은 한국의 경제 성장과 궤를 같이했다. 그를 일컬어 ‘완벽한 빛의 제조자’라고 말한다. 빛은 사진의 생명이다. 완벽한 사진을 위해 그는 빛의 연금술사가 된다. 그의 사진 안에 우리가 상상하기 힘든 빛들이 크고작게 드러난다. 완벽한 사진술의 구현이다. 그는 “자넷 스튜디오에서 일하면서 빛을 배웠다. 빛은 같은 f8의 값이라도 그 색깔이 다르다. 라이트 박스의 크기에 따라, 그 안 전구의 크기 따라, 모양 따라 빛은 모두 다르다” 고 말한다. 90년대 그의 상업사진이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촬영비 견적서란 것도 없던 낙후된 광고시장 시스템도 그의 고집과 의지로 변화를 일으켰다. 자신을 알지 못하는 광고주에게 포트폴리오 한 권 들고 들어가 마케팅을 했고 의뢰가 들어오면 미국식으로 견적서를 제출했다.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그 일을 하지 않았다. 다시 포트폴리오를 챙겨 거리로 나섰다. 그에게 오차는 없다. 소품 준비에서 촬영까지, 준비기간만 꼬박 석 달이 걸린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보다 그 전이 더 중요하다. “광고는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작업하고 다시 촬영할 수 없다.”그의 한마디가 가슴에 남는다. 2000년 삼성전자 국외광고 촬영이 들어왔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삼성전자는 국외 광고를 반드시 외국 사진가에 의뢰했다. 외국 유명 호텔 촬영도 의뢰가 왔다.
셔터 누르는 순간보다 그 전이 더 중요
몇 해 전부터 그는 조금 다른 사진을 찍는다. 사람과 그 흔적이다. 인물사진은 이미 오래 전부터 찍은 터였지만 지금 찍는 사람 사진은 더 짙은 인간애를 담고 있다. “눈으로 아름답게 느껴지던 것만 찾았다. 지금은 오감이 만족할 만한 것을 찾는다. 인생이, 철학이, 사진이 따로 나눠지는 것 같지 않다. ‘나’라는 존재가 사회의 어떤 영양분이 되고 몇 사람은 그로써 행복해졌으면 한다.”
그는 또다른 열정을 찾아 길을 떠난다. 반짝이는 눈매가 매력적인 남자. 그 열정에 감염될 것만 같다.
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작품사진: 사진가 준초이 제공
영화 <스텝맘>을 보면 사진가 줄리아 로버츠가 셔터를 누르기 전에 수많은 ‘포토 어시스트’들이 완벽한 세트와 조명을 준비한다. 뉴욕의 사진 스튜디오는 그처럼 분업화되어 있고 거대하다. 어시스트만 전문으로 하는 직업도 있다. 뉴욕의 사진가가 찍는 이미지는 바로 현대인들의 아이콘이 된다. 그곳은 이미지를 창조하고 싶은 모든 사진가들의 전쟁터이며 정글이다. 그곳에 준초이는 뛰어들었다. 그는 리처드 아베든 스튜디오는 아니지만 패션사진가 오먼드 기글리와 정물사진가 제럴드 자넷의 스튜디오에서 일했다. 힘들었다. 돈도 없었다. 말도 잘 통하지 않았다. 금요일 오후면 구토하는 병이 생길 정도로 그 정글은 참혹했다. 하지만 열정이 있었다. 미국인들 사이에서 부지런하고 일 잘하는 ‘초이’로 통하면서 자신만의 스튜디오를 열었다. 그곳에서 생존과 경쟁을 배웠다. 88년 한국에 돌아와 <준초이 비주얼>을 설립했다. 미국 사진가 친구들은 올림픽이 열리는 고국에서 할일이 더 많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그 충고는 맞아떨어졌다. 그의 상업사진은 한국의 경제 성장과 궤를 같이했다. 그를 일컬어 ‘완벽한 빛의 제조자’라고 말한다. 빛은 사진의 생명이다. 완벽한 사진을 위해 그는 빛의 연금술사가 된다. 그의 사진 안에 우리가 상상하기 힘든 빛들이 크고작게 드러난다. 완벽한 사진술의 구현이다. 그는 “자넷 스튜디오에서 일하면서 빛을 배웠다. 빛은 같은 f8의 값이라도 그 색깔이 다르다. 라이트 박스의 크기에 따라, 그 안 전구의 크기 따라, 모양 따라 빛은 모두 다르다” 고 말한다. 90년대 그의 상업사진이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촬영비 견적서란 것도 없던 낙후된 광고시장 시스템도 그의 고집과 의지로 변화를 일으켰다. 자신을 알지 못하는 광고주에게 포트폴리오 한 권 들고 들어가 마케팅을 했고 의뢰가 들어오면 미국식으로 견적서를 제출했다.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그 일을 하지 않았다. 다시 포트폴리오를 챙겨 거리로 나섰다. 그에게 오차는 없다. 소품 준비에서 촬영까지, 준비기간만 꼬박 석 달이 걸린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보다 그 전이 더 중요하다. “광고는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작업하고 다시 촬영할 수 없다.”그의 한마디가 가슴에 남는다. 2000년 삼성전자 국외광고 촬영이 들어왔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삼성전자는 국외 광고를 반드시 외국 사진가에 의뢰했다. 외국 유명 호텔 촬영도 의뢰가 왔다.
사진가 준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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