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4일 필리핀 코르디예라에서 열린 ‘코르디예라 마운틴 울트라’(CMU) 대회. 새벽 4시께 참가자 600여명이 짙은 어둠을 뚫고 47㎞ 장도에 나서는 모습. 윌리엄 칭 제공
필리핀 마닐라에서 출발한 버스에 몸을 싣고 구절양장(꼬불꼬불하고 험한 산길)의 길을 달린 지 세시간쯤 지났을 때 버스는 작은 간이 휴게소 앞에 멈췄다. “써티 미니츠(30 minutes)!” 운전석에서 일어난 기사는 승객들에게 30분 쉬어간다는 의미로 손가락 세개를 펼쳐 보인 뒤 밖으로 빠져나갔다. 버스의 시동이 꺼지자 사방은 일순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앞뒤 좌석에 탄 사람들이 타갈로그어로 두런두런 나누는 대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나가자.” 케이(K)가 기지개를 켜며 나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눈앞에는 따사롭고 평화로운 풍경이 펼쳐졌다. 사방은 어느새 산으로 겹겹이 둘러싸여 있었고 비탈을 깎아 만든 논밭이 발밑으로 아득했다. 뭉게구름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정상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지금 이곳은 어디인가. 통신이 터지지 않아 좌표조차 파악할 수 없는 지점이었다.
이곳은 필리핀 북부 코르디예라 지역의 어느 산간 마을이었다. 버스를 타고 떠나온 거리만큼 앞으로 더 이동하면 목적지인 바기오에 도착한다. 도대체 얼마 만에 다시 이런 여행을 떠나온 걸까. 분주한 생활인의 일상 탓에 돈보다는 시간이 필요한 여행에 다시 나서기까지 거의 10년이 걸렸다. 네팔 안나푸르나에 가려고 첫 직장을 그만두고 배낭을 꾸린 것이 2011년 4월. 당시 두달 일정으로 나선 여행은 반년이 지나도록 계속됐다. 이유는 한가지. 길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 의지로는 멈출 수가 없었다. 돌아갈 곳도 없었다. 주머니가 떨어질 때까지 한번 버텨보자. 가난하지만 모든 것을 다 가진 이상한 인생 여행의 서막은 그러했다.
2022년 12월 초, 열흘 일정으로 다녀온 이번 코르디예라 여행의 발단은 에스(S)였다. 젊은 날 세계 곳곳을 자유로이 유랑하다가 필리핀에 주저앉아 사계절을 보낸 그가 가장 자주 드나들었던 곳이 이곳 코르디예라 지역이었다. 코르디예라는 필리핀 북부 루손섬의 거대한 산악 지대로, 자연경관이 매우 아름다운 오지 트레킹 성지로 알려진 곳이다. 산을 좋아하던 에스는 5년 전 코르디예라 산군을 달리는 울트라 트레일러닝 대회 ‘코르디예라 마운틴 울트라(CMU)’에 처음 출전해 완주했다. 이후 매해 연말이면 연례행사처럼 코르디예라를 찾아가는 그의 이야기에 홀려 나와 케이까지 동행한 것이다.
마닐라에서 바기오까지 버스를 타고 여섯시간 이동한 데 이어, 두시간 더 송태우(트럭을 개조한 버스)를 타고 대회장이 있는 달루피립에 도착한 우리는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작은 시골마을이라 편의시설이 넉넉지 않은 까닭에 우리는 마을 주변에 텐트를 치고 잠들었다.
이튿날 새벽 3시에 기상해 한국에서 챙겨온 라면과 컵밥으로 간단히 허기를 채웠다. 새벽 4시께 나와 에스와 케이는 헤드랜턴을 켜고 산속에서 달리기 시작했다. 총 거리 47㎞, 누적 상승고도 3200m의 산길을 달리는 시엠유 대장정의 시작이었다. 열대 기온의 필리핀도 밤에는 서늘했으나 바람막이 재킷의 옷깃을 펄럭이며 눈앞에서 명멸하듯 사라져 가는 사람들을 따라 뛰니 온몸은 어느새 땀으로 흠뻑 젖었다. 출발 직전까지만 해도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처럼 자못 비장했는데 달린 지 5분도 안 돼서 속수무책으로 헉헉거리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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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연속 완주한 한국인 에스(S)를 위해 주최 쪽에서 특별히 물 세례 세리머니를 준비했다. 장보영 제공
해발 1700m 이상의 큰 산을 세개나 넘어야 하는 이 대회의 최고봉은 첫번째 봉우리인 해발 2150m의 우고산이었다. 우고산은 코스의 중간 지점인 22㎞ 부근에 솟아 있었다. 몸이 다소 지쳐 있는 데다 정상까지 계속되는 10㎞의 오르막길을 뛰어야 해서 피로감이 극에 달하는 ‘깔딱 봉우리’였다. 이를 악물고 우고산을 오르는 동안 서서히 여명이 밝았다. 아쉽게도 해는 구름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으나 안개 속에서 아른거리는 검푸른 소나무는 오래도록 잊을 수 없는 풍경이었다. 우고산에서 내려오고도 한참은 더 달려 정오께 결승선에 골인했다. 8시간 정도 걸렸다. 내가 겪은 가장 긴 밤이었다.
시엠유가 특별한 것은 대회를 치르기 위해 환경을 무분별하게 개발하거나 훼손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대회 운영에 들어가는 일부 금액을 제외한 참가비 대부분은 코르디예라 지역 보존 기금으로 쓰이며, 그 덕택에 참가자들은 매해 코르디예라 산군이 간직한 있는 그대로의 자연과 오롯이 만날 수 있었다. 숙소를 구하지 못해 불편을 감수해야 했던 것도 당연했다. 이곳은 흔한 관광지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야생을 보존하라(Keep the Wild)’는 대회 슬로건이 말해주듯 자연은 인간이 쾌적한 상황에서 즐기는 하루 치 체험이 아니었다.
시엠유를 달리기 위해 필리핀 현지에서뿐만 아니라 인근의 태국·말레이시아·베트남 등에서도 많은 선수들이 찾아온 것을 보며 새삼 동남아 전역에서 불고 있는 트레일러닝의 인기를 체감했다. 먹고 사는 생존의 문제와 별개로 산을 오르고 달리는 사람들에게서는 언제나 무한한 인류애를 느낀다. 그들이 부디 멈추지 않고 달려주기를, 산을 오르고 달린 힘으로 삶의 고비에서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기를 말없이 응원했다.
이튿날 우리는 바기오를 벗어나 차로 이동하는 데 5시간 걸리는 사가다로 향했다. 시엠유 혹독한 레이스에 지쳐 두번 다시 산은 쳐다보기도 싫다고 떠들었지만, 이내 더 깊은 산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다시 오른 구절양장의 길 위에서 차창 밖으로 끊임없이 흘러가는 능선을 바라보며 지난밤 산속에서의 사투를 떠올렸다. 며칠 전 우리가 달린 우고산은 어디쯤 있을까. 꿈이었을까. 에스와 케이의 몰골을 보니 그건 아니었다.
장보영 등산여행가
스물다섯 살에 우연히 오른 지리산에 매료된 이후 히말라야와 알프스, 아시아의 여러 산을 올랐다. 그러다 산을 달리기 시작했고 산악 잡지도 만들었다. 지은 책 ‘아무튼, 산’은 산과 함께한 청춘의 후일담을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