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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울분이 부른 불면-과수면의 악순환 [ESC]

등록 2023-04-21 07:11수정 2023-04-21 09:07

자는 것도 일이야
3시간도 못 자다가 퇴근하자마자 또 잔다
화요일이 수요일 같고 수요일이 목요일 같고
표리부동·억압에 소용돌이 같은 환멸만
슬프면 울고 불의에는 화내자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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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앤절리나 졸리한테 좀 물어봐 달라. 왜 그런 어중간한 시간에 날 깨웠냐고. 졸리는 그날 내 꿈에 나왔다. 우린 제법 친분이 있었다. 사적인 대화를 했고, 셀카를 찍었으며, 친필로 쓴 메모를 교환하기도 했다. 유쾌했다. 졸리가 돌연 미간을 찌푸리며 내 등을 떠밀기 전까지는. "나연! 너 회사 가야지?”

아뿔싸.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을 땐 10시가 넘어 있었다. 알람? 끈 기억이 없었다. 퇴근하자마자 쓰러져 잠든 기억은 났다. 알람도 안 맞추고 뻗은 모양이었다. 부리나케 욕실로 갔다. 세수를 했다. 옷을 입었다. 노트북을 챙겼다.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은 건 거실로 돌진한 뒤였다. 적요하고 캄캄한 분위기. 칼바람 부는 계절 새벽녘에야 느끼는 싸늘함 같은 거. 그제야 밀려드는 의구심. 아니, 지금이 아침이여, 밤이여?

그랬다. 내가 깬 시각은 아침 아닌 밤 10시였다. 2시간 정도밖에 못 잔 건 그렇다 치더라도, 상황 파악이 재깍 안 된 건 문제가 있었다. 한동안 정신이 멍했다. 휴대폰 시계에는 오전·오후가 뜨지 않았고, 달력을 봐도 모르겠더라. 화요일이 수요일 같고 수요일이 목요일 같고 목요일이 금요일 같아 지금 보는 이 날짜가 어제였는지, 오늘인지, 내일일지 분간할 수 없었다. 탄식이 나왔다. 하, 드디어 내가 맛이 갔구나!

극도로 불규칙해진 수면 주기 탓이다. 최근 나는 3~4일 단위로 불면과 과수면을 오간다. 불면일 때는 3시간을 채 못 자지만, 과수면일 땐 출퇴근길 병든 닭처럼 졸고도 귀가하자마자 또 잔다. 질 낮은 수면에 이골이 났음에도 전례가 없는 패턴이다.

기점이 된 사건이 있었다. 권한을 가진 특정인이 주도한 그 사건. 그 사건은 무능과 부도덕에 대한 책임 회피이자 공동체 분열을 꾀한 부당 행위였다. 그 사건은 피해자들의 근면과 성실, 재능과 역량, 의욕과 열정을 악용한 것도 모자라 지위상 우위를 이용해 피해자들을 괴롭힌 가해행위였다. 또한 그 사건은 도덕적 해이에서 비롯된 비위 의혹을 은폐하려는 기피 행동이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그 피해자 중 하나였다.

제목만 봐도 끌리는 <울분>을 다시 읽는다. 미국 문학 거장 필립 로스가 쓴 소설이다. 죽어서까지 특정 순간을 반추하는 주인공 마커스의 목소리에는 그야말로 울분이 가득하다. 표리부동하고 해명되지 않은 순간에 대한 울분, 결국 불가사의로 남은 순간에 대한 울분, 억압과 상실에 대한 울분.

며칠간 지속된 과수면에서 벗어나 또다시 불면의 터널로 들어선 2023년 4월의 어느 밤, 이 글을 쓰는 나도 마커스처럼 울분을 느낀다. 분노와 환멸이 더해진 감정의 소용돌이를 느낀다. 헌신하고 희생할수록 그걸 ‘정상’으로 여기는 것에 대한 울분. 반민주적·반지성적으로 자행된 폭압에 대한 분노. 도전하고 노력할수록 이용만 당하는 현실이 주는 환멸. 우리는 처절할 만큼 일했다. 숫자로 입증되는 탁월한 성과도 그에 기인한 거였다. 우리는 하라는 대로도 했다. 돌아온 건 배신과 횡포였다. 안 될 일이었다. 우린 그런 걸 당하면 안 됐다.

최근 내가 겪는 기이하고도 불규칙한 수면은 이 감정의 소용돌이가 잠잠해지기 전까진 해결되지 않을지 모른다. 거대한 감정에는 내 삶을 변화시키고 성장시키는 통찰이 담기게 마련이다. 이제 내 감정을 들여다봐야 한다. 감정을 숨겨야 한다거나, 감정을 숨기려고 애쓰는 자체를 숨겨야 한다는 억압에서 벗어나야 한다. 감정탱크가 꽉 차서 더는 수신도 안 되고 열어볼 엄두도 안 나는 메일함처럼 되면 곤란한 일이니까.

혹자는 이런 말도 한다. 과거는 잊고 미래만 보라고. 무용한 말이다. 우린 불가해한 일일수록 더 오래 기억한다. 이해되지 않으면 곱씹게 되기 때문이다. 잊히지 않을뿐더러 잊어야 할 필요도 없다. 이미 받은 피해를 잊어야 한다면 복수극은 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기이며, <더 글로리>는 왜 나왔단 말인가?

난 이미 알고 있다. 덮어둔 과거를 직면해야 새로운 문이 열린다는 걸. 그게 곧 발전과 성장의 길이며, 그래야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그릇된 과거와 거기서 촉발된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것. 외면하지 않고 직면하는 것. 답은 거기에 있다.

“분노는 우리의 모든 감정 중 가장 희망에 차 있고 진취적이다. 분노는 변화를 부르고 열정을 표명하는 동시에 우리를 세상에 계속 발붙이게 한다. 분노는 침입, 폭력, 무질서에 대한 이성적인 동시에 감정적인 반응이다. 분노는 ‘현상’과 ‘이상’ 사이에, 힘겨운 과거와 나은 미래 사이에 다리를 놓는다.”(소라야 시멀리 <우리의 분노는 길을 만든다>)

새벽 5시20분. 나는 침대에 누워 허공을 보다가 책상 앞으로 돌아왔다. 숙면에 좋은 캐모마일을 마시고, 이제는 노트북 화면을 바라본다. 개인의 울분은 곧 시대의 울분이다. 개인의 분노는 곧 시대의 분노다. 개인의 환멸은 곧 시대의 환멸이다. 역사는 당연하게 여기던 것들이 당연하게 여겨지지 않는 쪽으로 진보해왔다. 나는 다짐한다. 내 울분과 분노와 환멸을, 결코 무기력과 우울과 낙담으로 환원시키진 않겠다고. 잘못된 과거도, 망가진 수면 패턴도 바로잡겠다고.

그건 그렇고. 앤절리나 졸리한테 묻고 싶다. 언니, 나 골탕 먹이고 잠은 잘 잤수?

이주의 ‘불면 극복’ 솔루션

부정적 감정이 들끓을 때 삭히는 게 능사는 아니다. 슬프면 울고, 불의에는 화내자. 긍정의 힘은 내면의 힘과 동의어가 아니다. 내면의 힘은 슬픔, 불안, 분노 등을 구분해 적절히 처리하는 과정에서 생긴다. 특히 MBTI 중 T는 생각과 감정을 구분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감정을 외면하고 생각에만 집중하면 그 증거가 타당해도 편향적이고 틀린 가정을 내놓는 추론 오류에 빠진다. 감정을 잘 다뤄야 잠도 잘 온다. 물론 나부터 잘하자. ★★★★★

강나연 <허프포스트코리아>·<씨네플레이> 편집장

방송기자를 거쳐 디지털 뉴스매체, 디지털 영화 매체를 맡고 있다. 엠비티아이(MBTI) 중 파워 제이(J) 성향이지만, 10년 이상 장기계획은 세우지 않는다. 책, 영화, 명상이 에너지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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