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감이 오면 좋겠다.’ 나는 만화가다. 스토리텔링에 대해 밤낮으로 고민한다. 어떻게 하면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까,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한다. 그럴 때면 일 그만하고 자기랑 놀자며 아이가 놀잇감을 가져온다. 요즘은 ‘뱀주사위놀이’를 들고 온다. 나도 기억이 잘 안 나는 옛날 보드게임인데, 지금 아이가 놀기에도 재미있나 보다. 뱀주사위놀이의 데이터를 분석하면 스토리텔링의 영감이 오지 않을까?
뱀주사위놀이에는 여러 ‘판본’이 있다. 우리집에 있는 놀이판은 주사위를 던져 나온 수대로 움직이되, 고속도로를 타면 타고 올라가고 뱀을 타면 미끄러져 내려오는 놀이다. 고속도로는 보너스 점수, 뱀은 벌점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일해서 돈을 벌 거나 공부해서 과학자 되는 ‘성공’이 배점이 높다. 보너스 점수 가운데 44.9%다.(전체 214점 중 96점) 폭발물을 가지고 놀거나 불장난을 하는 ‘안전사고’가 벌점이 크다. 전체 벌점의 47.8%다(272점 중 130점).
고속도로를 타는 행운 점수는 총 214점, 뱀을 타는 불운의 벌점은 272점이다. 불운 점수가 27.1% 더 높다. 비슷한 보드게임인 ‘스머프 사다리 게임’을 분석해도 결과가 비슷하다. 불운의 미끄럼틀이 168점인데 행운의 사다리가 127점이다(불운이 32.3% 높다). 좋은 일보다 나쁜 일이 많아야 재미있는 게임이라는 뜻일까. “주인공이 하는 일마다 어려움을 겪어야 이야기가 재밌다”는 전통적인 스토리텔링의 원칙에 맞아서 반갑다.
또 하나 눈길을 끄는 점이 있다. 고속도로가 시작하는 행운의 지점은 게임 초반, 뱀이 시작하는 불운의 지점은 게임 후반에 몰려 있다는 사실이다. 뱀주사위놀이의 구조상 당연하기는 하다. 처음에는 뱀에 걸려 미끄러져도 내려갈 곳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의도했건 아니 건 “이야기 뒤로 갈수록 주인공이 겪는 어려움이 커져야 한다”는 스토리텔링의 원칙과 맞다.
장기와 바둑이 실력에 좌우되는 게임이라면, 뱀주사위놀이는 운 게임이다. 게임을 하는 사람이 전략을 짜거나 선택할 일이 없다. 그래도 재미있는 것은 어째서일까. 선택은 없지만 예측이 있기 때문이리라. “가장 큰 불운을 겪고 또 불운을 겪진 않겠지”라거나 “불운을 겪은 직후 최고 행운이 찾아오진 않겠지”라고 예측을 한다. 그런데 두어 번 연속 특별한 주사위 눈이 나올 확률을 계산해보면 별로 낮지 않다. 그런데도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나면 우리는 대단한 불운이나 행운을 겪은 것처럼 약이 오르거나 신이 난다.
운 게임의 좋은 점이 또 있다. 실력 게임은 실력 없는 언더독이 이기기 쉽지 않다. 역전하기도 어려운 편이다. 그런데 뱀주사위놀이는 그게 가능하다. 그래서 어른과 어린이가 함께 즐길 수 있다. 추격과 대역전극은 이야기에서나 스포츠에서나 게임에서나 남녀노소가 가장 즐기는 스토리텔링이기도 하다.
김태권 만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