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금희의 식물 하는 마음
게티이미지뱅크
정말 봄은 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3월 들어 발코니에서 오래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날이 따뜻해지기도 했고 새잎들이 얼굴을 보여주고 있기도 해서다. 겨우내 죽었다고 생각했던 자엽안개나무는 어느 날부터 새잎을 하나둘 내더니 급기야 꽃대까지 피워 올렸다. 그때의 기쁨을 무엇에 비할까. 가을이 무르익기도 전에 잎이 다 마르고 응애의 습격도 받았던 터라 사실 포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나의 나약함을 일깨우듯 꽃과 잎을 틔우다니. 나는 그 귀여운 연녹색 잎을 조심스레 만져보았다. 이제 막 피어난 잎은 믿을 수 없게 연하고 기분 좋은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아직 충분한 증산 작용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일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바람을 통과하고 해를 쬐고 건조한 대기에 맞서다 보면 잎은 더 튼튼해질 것이다. 색이 짙어지고 두께는 두터워지면서 더 또렷한 잎맥을 보여주게 되겠지. 봄이 가져온 근사한 소식이었다. 하지만 처음 본 자엽안개나무 꽃의 아름다움은 다소 애매했다. 얇은 줄기에 어딘가 애처로워 보일 정도로 가느다란 가지들을 달고 있었고, 가까이 들여다보아야만 겨우 알 수 있는 미세한 꽃잎을 달고 있었다. 1미터가 넘는 나무 크기를 고려해보면 꽃이 차지한 존재감은 아주 희미했지만 어쩌면 그래서 특별하지 않은가 생각했다. 죽었다고 생각하면서도 겨울 내내 물을 준 내 시간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미 죽었을 거야, 소용없을 거야, 하면서 왜 나는 물 주기를 멈추지 않았을까. 회생을 기다리는 마음이 있어서였다. 말라 죽었으리라는 판단이 이성의 영역이라면 기다림은 마음에서 이는 일이니까. 그래서 우리는 지구가 멈추지 않는 한 봄이 어김없이 오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끈질기게 봄을 기다린다. 잡지나 에스엔에스(SNS) 속 식물들은 말 그대로 그림 같은 아름다움을 보여주지만 실제로 식물을 길러보면 그렇지 않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모두들 제멋대로 자라니까. 웃자라고 대책 없이 무성해지고 그냥 위로만 직진하고. 그런 문제들을 다 안고 있는 우리 집 칼랑코에가 화려한 꽃을 활짝 피웠을 때 그래서 나는 당혹감을 느꼈다. 빛이 잘 들지 않는 진열대 나무살 사이로 뻗어 나가다 발코니 유리창에 기대 웃자랐고 어느 순간 일조량이 충족되자 어마어마한 꽃을 피운 것이기 때문이다. 유리창이 없다면 줄기가 버틸 수 없을 정도의 무더기 꽃이었다. 내가 기르는 식물에 대해 이렇게 묘사한다면 미안한 일이지만 솔직히 약간은 파리채 같달까. 거기다 손가락처럼 분지된 꽃대가 유리창에 찰싹 달라붙어 있으니 뭉크의 그림 속 피사체들처럼 기이하게 뒤틀린 느낌이었다. 차라리 꽃대를 자를까도 생각했다. 그러면 뭔가 일반적인 형태로 다시 자라지 않을까. 가위를 들 일이 있을 때마다 그 앞에서 고민했지만 끝내 자르지는 못했다. 그렇게 망설이는 겨울을 보내며 나 역시 여러 번 생각의 겹을 벗었고, 그중에는 지나간 시절들에 감정적 서사를 부여하지 않겠다는 결심도 있었다. 그건 잊는 것과는 다르고 동일한 감정적 반응을 하면서 그 상처에 계속 갇히는 것과도 달랐다. 더 이상 나를 약자로 여겨 연민하지 않는 것, 위기를 맞아 뒤틀렸던 나를 이해하는 것, 내가 원하던 형태와 달랐다며 삶의 어느 시절을 다 부정하지는 않는 것. 칼랑코에는 그저 자기가 가장 왕성하게 살아낼 수 있는 쪽으로 힘을 썼을 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칼랑코에가 피운 그것은 가장 자연스러운 꽃처럼 느껴졌다. 어제는 다정큼나무의 마른 잎들을 손으로 떼주었다. 낙엽이 되어 진작 떨어져야 했을 마른 잎들이 계속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새잎이 드문드문 나고 있었다. 이렇게 해주는 게 맞나 싶었지만 일단 톡 건드려 떨어뜨리기 시작하자 손길을 멈출 수는 없었다. 흐린 창을 호스로 촤악 닦아내는 것처럼, 묵은 설거지를 반짝반짝하게 해내는 것처럼 기분 좋은 상쾌함이 들었다. 발코니 식물들 발치에 소복하게 자라고 있는 자주괭이밥도 조금 뜯어주었다. 화분 속에 깊이 뿌리 내려 다른 식물의 생장을 방해한다는 말도 있지만 적어도 내 발코니에서 괭이밥은 매우 어엿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괭이밥이 자리 잡으면 확실히 식물들이 잘 자랐기 때문이다. 우연일 수 있지만 얼음 상태이던 올리브가 깨어난 것도 다정큼나무가 작년에 꽃을 잘 피운 것도 사실 자엽안개나무가 잎을 낸 것도 모두 괭이밥과 함께였다. 실제로 괭이밥은 인간의 몸에 해독 작용을 하고 온갖 염증을 다스린다. 해충 응애의 천적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러니 짐작이 아주 틀린 건 아닐 것이다. 물론 결과가 항상 좋지는 않으니 각자의 발코니에 적용하는 데는 신중하길 바란다. 괭이밥과의 공생을 처음으로 시작했던 내 티트리나무는 이유가 어쨌든 고사했고 지금 그 토분은 괭이밥이 다 차지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고사리의 마른 잎들을 정리하는 것이 어제의 마지막 작업이었다. 그러고 나서 엉망이 된 발코니를 빗자루로 싹싹 쓸어내는데, 남천 화분에 작은 흰애벌레가 꾸물거리는 것이 보였다. 떠낼 생각으로 얼른 모종삽을 가져오자 그새 흙으로 들어가 찾을 수 없었다. 정말 봄은 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봄은 그냥 날씨나 풍경으로만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실제의 일들과 함께 오니까. 청소를 마치고 들어와 바로 인터넷에서 약제를 주문했다. 올해는 또 어떤 해충들이 내 속을 썩일까, 고온다습한 여름은 어떻게 무사히 통과할까. 익숙한 어려움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래도 새날이 왔다는 기분만은 여전했다. 그러한 환희는 분명한 마음의 영역, 선택이나 선별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의 가장 깊은 곳에서 조용히 번지는 자연스러움이기 때문이다. 김금희 소설가
봄은 그냥 날씨나 풍경으로만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실제의 일들과 함께 오니까.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