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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토마토 말리고, 고추 다지다 얻은 깨달음

등록 2022-01-28 09:57수정 2022-01-28 10:02

신소윤의 텃밭 일기
쑥갓 페스토부터 콜라비 피클까지
봄~가을의 결실 잘 저장해뒀다가
쏙쏙 빼먹다 보면 다시 봄이 올 거야
텃밭의 열무 모종. 신소윤 기자
텃밭의 열무 모종. 신소윤 기자

농사를 짓기 전과 비교해 달라진 것 가운데 하나는 저장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밭은 마트처럼 농작물을 내가 필요한 때에, 필요한 만큼만 조금씩 내어주는 곳이 아니었다. 가지 철이 되면 가지가 줄줄이 열렸고, 토마토 철이 되면 토마토를 와르르 쏟아냈다. 3평 텃밭을 쪼개고 쪼개 다품종 소량생산을 추구해도, 주중에 집에서 제대로 밥을 차려 먹을 일이 많지 않다 보니 농작물이 쌓이기 시작했다. 주변 여기저기 나눠주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그렇다고 땀 흘려 기른 농작물을 시들게 뒀다 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저장 음식을 만드는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우선 만만한 허브부터 도전했다. 루콜라, 바질 등 봄철의 허브는 생으로 먹어도 좋지만 찧고 빻아서 저장해두면 응축된 향을 즐기기 좋다. 5~6월 정신없이 잎을 내는 바질은 올리브유·잣·마늘·치즈·소금 등을 넣고 블렌더에 갈아, 일종의 이탈리아 양념장인 페스토를 만들어뒀다. 짭조름하고 고소한데다 코끝을 탁탁 치고 올라오는 풀 향이 빵, 파스타, 샐러드 등 어느 음식에나 잘 어울린다.

그리고 이보다 더 좋았던 건 ‘코리안 허브’인 쑥갓으로 만든 페스토였다. 일단 쑥갓은 날씨가 더우면 벌레가 끼기 쉬운 바질보다 기르기가 수월했다. 너무 번잡하게 잎을 내고 키를 키워, 먹는 속도가 자라는 속도를 따라잡기 어렵단 게 문제라면 문제랄까. 쑥갓 잎을 한 소쿠리 가득 걷어 잘 씻어 물기를 털어낸 뒤 바질 페스토와 같은 방법으로 만들어보자. 대신 쑥갓은 양이 많으니 비싼 잣보다는 캐슈너트나 호두 같은 견과류로 대체해도 충분하다. 넉넉한 양이라 주변에 선물하기도 좋고, 작은 통에 한끼 먹을 만큼씩 담아 냉동실에 넣어두면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다.

쑥갓 페스토를 얹은 카나페. 신소윤 기자
쑥갓 페스토를 얹은 카나페. 신소윤 기자

하늘하늘한 잎을 흔들 때마다 기분 좋은 향이 나는 딜은 레몬 껍질과 함께 잘게 다져 요즘 유행하는 레몬 딜 버터를 만들어두면 꽤 활용도가 높다. 생선이나 고기를 구울 때 한 조각 넣으면 잡내를 잡아줘 맛이 한 단계 정도는 업그레이드된다. 명절 선물로 곶감이 들어왔다면 곶감을 반 갈라 쫙 펼친 뒤, 레몬 딜 버터와 호두를 잘 정돈해 넣고 돌돌 말아 냉동실에서 살짝 굳힌 뒤 썰어 먹으면 간단한 와인 안주로 좋다.

키가 어른 손 한뼘 크기였던 방울토마토 모종은 여름이 되면 밭을 정글로 만들 정도로 무성하게 자란다. 열매 또한 셀 수 없이 달리기 시작하는데, 알알이 반으로 쪼개 쪼글쪼글해질 정도로 말리면 이게 선드라이드 토마토다. 아파트 생활자에게 햇볕에 곱게 말릴 공간은 없으니 오븐이나 식품 건조기를 사용하면 된다. 쫀득하게 말린 토마토 한 알을 씹으면 새콤달콤한 맛이 있는 힘껏 몸을 움츠려 있다가 입속에서 쫙 펼쳐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잘 말린 토마토는 로즈메리 등 허브와 함께 올리브유에 절여두면 토마토의 계절이 지나도 한동안 즐길 수 있다.

매끈하고 야무지게 자란 고추는 잔뜩 갈아서 경상도 쪽 음식으로 알려진 고추장물을 만들면 이게 또 밥도둑이다. 온라인에 떠도는 레시피가 다양한데, 기본적으론 다진 고추와 마늘과 마른 멸치를 참기름에 볶고, 간장으로 간을 맞추면 된다. 나는 멸치가 씹히는 게 싫어 블렌더에 곱게 갈아서 넣는다. 풋고추에 청양고추를 4분의 1쯤 섞어 만들면 알맞게 매콤하고 좋다. 누룽지 한 그릇에 간단히 먹기에도 좋고, 김밥의 속 재료로도 별미다. 오일파스타와도 궁합이 좋아 느끼함을 딱 잡아주며 입에 착착 달라붙는다.

이외에도 콜라비와 셀러리로 만든 피클, 가을배추와 무로 만든 김치까지 지난봄·여름·가을의 결실이 겨울 나의 냉장고에 저장돼 있다. 겨우내 이것들을 쏙쏙 빼먹다 보면 기다려 마지않는 봄이 오지 않을까.

부지런히 저장 음식을 만든 데에는 애써 기른 농작물이 아까웠던 이유도 있었지만, 채소를 다듬고, 칼로 썰고, 다지고, 말리고, 볶고, 섞는 일련의 과정이 주는 위로의 감각이 좋아서이기도 했다. 머릿속을 복잡하게 하지 않고 순전히 손을 써서 노동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마음이 고요해진다. 단순하고 정직한 노동과 시간이 쌓여야만 가능한 일, 이 또한 내가 밭에서 얻은 소중한 깨달음 가운데 하나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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