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너선 스펜스의 궂긴 소식을 연말에 들었다. 중국 역사 연구가로 명성이 높았는데, 그의 업적을 알아보고 평가할 실력이 나는 없다. 좋은 글을 써주시던 작가로 나는 기억한다. <마테오 리치 기억의 궁전>은 내가 읽은 가장 아름다운 책 가운데 하나다.
마테오 리치는 예수회 신부다. 그리스도교를 전하러 명나라에 왔다. 지식인과 관료를, 나아가 황제를 포섭할 셈이었다. 두가지 작전이 흥미롭다. 하나는 옷차림이다. 처음에는 종교인이라는 점을 내보이기 위해 머리를 깎고 불교 스님처럼 입었다. 그러다가 사대부를 꼬드기기 위해 전술을 바꿨다. 수염을 기르고 유학자의 의관을 갖춰 입었다.
또 하나는 기억의 기술을 자랑한 것이다. 마테오 리치는 기억법의 대가였다. 유교 경전을 달달 외워야 했던 명나라 사대부들은 그의 기억력을 부러워했다. 리치는 중국 사람을 위해 기억법 교재를 썼는데, 커리큘럼 안에 그리스도교의 상징을 숨겨 넣는 기상천외한 시도를 했다.
기억의 궁전. 그가 사용한 기술의 이름이다. 귀에 익다. 영국 드라마 <셜록>에 나와서다. 까마득한 옛날, 고대 그리스의 시인 시모니데스가 개발했다. 사연이 있다. 임금님이 잔치를 열고는, 시인 시모니데스더러 시를 지으라고 했다. 시인은 임금과 쌍둥이 신 디오스쿠로이를 묶어 칭찬하는 시를 지었다. 오만한 임금은 약속한 돈의 절반만 시인에게 줬다. “나머지 보상은 쌍둥이 신에게 받으라”며 잔치에 모인 사람들과 함께 비웃었다. 신화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이들이 곧 나쁜 일을 당하겠구나 짐작할 터이다.
잔치가 한창일 때 두 청년이 궁궐 밖에 나타나 시모니데스를 찾았다. 시인이 나가자마자 궁궐이 폭삭 무너졌다(청년도 간 곳 없었다, 신이었을까). 희생자를 장사 지내야 하는데 누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유일한 생존자 시모니데스는 기억을 더듬었다. 기억의 비결은 장소였다. 누가 누구 곁에 있었는지 연결하자 기억이 살아났다.
기억의 궁전은 상상 속에 거대한 궁전을 짓는 방법. 익히기는 쉽지 않다. 원리는 같고 실행은 간단한 두가지 기술을 소개한다. 하나는 자기가 사는 집을 이용하는 기억법이다. 이 글의 개요를 외워보자. 현관 앞에 신문이 왔다. 스펜스의 궂긴 소식이 실렸다. 현관을 들어오면 신발이 있다. 마테오 리치는 ‘신’을 믿던 사람이다(억지스러워야 잘 외운다). 들어오자마자 책이 쌓여 있다. 외워야 할 책들이다. 손을 씻으려 화장실 문을 여니 그 안이 궁전처럼 화려하다. 방에 들어가니 텁수룩한 그리스 시인이 앉아 있다. 또 하나는 자기 몸을 이용하는 법이다. “아야!” 당근을 내 머리에 꽂고 코에 소시지를 매다는 따위 상상을 해 장보기 목록을 외울 수 있다. 관건은 ‘연결’이다.
창의력 칼럼에 기억법 이야기를 쓴 이유는? ‘익숙한 요소의 낯선 연결’이라는 점에서 창의력과 기억법이 통하기 때문이다. 독자로서 조너선 스펜스를 추모하고도 싶었고.
김태권 만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