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 선배 소설가가 “이 일에는 축적이 없다”라고 한 말을 거의 매일 떠올리며 살고 있었다. 나만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야말로 불분명한 불안과 공포로부터 스스로를 구해내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동료 소설가들을 만났다. 일이 끝나고 잠깐 차를 마시기 위해 걸으며 우리는 이게 얼마 만이야, 너무 반갑다, 라는 말을 반복했다. 그리고 우리가 마주치면 늘 하는 이야기, 등단한 이듬해인가 어느 술자리에서 그 무렵 등단한 거의 모든 신인작가가 모였던 일을 다시 떠올렸다. 내가 이상하게 세월이 흘러도 그때 그 혜화동 술집은 너무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고 하자 다른 소설가들도 그렇다고 맞장구쳤다.
정말 내게는 그날이 바로 어제의 일처럼 가까웠다. 심지어 우리 중 한 명은 서른 살도 안 되었던 때였다. 그 오래전 밤에 나는 소설가 Y가 자신의 스승인 모 소설가 선생님에 대해 이야기하며 한없이 환한 표정을 지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소설을 쓰고 읽고 가르쳐온 사람을 흠모하며 자신의 미래를 조심스레 꿈꿨을 Y, 나는 그 밤 그가 소설의 모든 것을 좋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애정하는 또 다른 소설가인 K는 오래전 그날 조금 늦게 합류했는데 그의 작품이 그렇듯 재치 있고 유머러스하고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자기 몸집만 한 가방을 메고 나타나 날이 추워 옷을 이렇게나 껴입었다며 내게 보여주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웃었던 기억이 있다. 내가 “그날 옷 많이 입었다고 말하던 게 생생해”라고 하자 K는 “오늘도 그랬어” 하며 장난스럽게 자기가 입은 옷의 개수를 또 보여주었다.
사실 소설가들은 만나서 서로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는다. 일의 고충을 하소연하느라 시간과 에너지를 다 쓰기 때문이다. 그날도 사는 얘기, 살긴 사는데 늘 이런저런 고민이 드는 얘기들을 하며 약간 분위기가 어두워지는데 뭔가를 기르는 것에 관한 화제가 나왔다.
“맞아, 너 식물 기르잖아.”
K가 글에서 봤다며 내게 말했다.
“응, 맞아.”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K는 식물 얘기가 나오니까 얼굴에 화색이 돈다며 “너 정말 좋아하는구나”라고 인정해주었다. 그리고 자신은 수년째 금붕어를 기르고 있다고 했다. 금붕어는 얼마나 사느냐고 하자 오년 정도라고 답했고 그건 내 예상보다는 긴 시간이었지만 그 또한 이별을 맞이하는 입장에서는 많이 아쉬운 시간이겠구나 싶었다. Y는 최근에 달팽이들을 보살피고 있다고 했다. Y가 뜻하지 않게 달팽이 무리의 보호자가 된 이야기는 무척 재미있지만 내가 산문으로 쓰는 것은 적절치 않을 듯하다. 언젠가 Y가 소설이나 산문으로 그 얘기를 써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무튼 Y는 자기가 시작하지도 않은 그 일을 자기 신념을 가지고 성실히 수행하고 있었고 그 보호자 역할을 제대로 해내기 위해 텃밭세트를 사서 푸성귀들을 직접 기를까 고민하고 있었다.
K는 이제 몇 개의 화분을 기르기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그것이 주는 마음의 정화가 커서 앞으로도 계속 길러볼까 한다고 의지를 보였다. 누군가가 식물에 관심을 갖는 일, 욕심을 내는 일은 내가 가장 반기는 것이라서 반색했다. 여태껏 화분을 하나도 죽이지 않은 것만 봐도 분명 K는 식물을 잘 기르는 사람, 그린 핑거스가 분명하다며 계속 키워보라고 독려했다.
어디 식물만 그럴까, 같은 취미를 공유하는 일은 세상 어느 관계보다 사실 안전하고 대가 없는 즐거움을 나눌 수 있는 행위다. 좋아하는 마음에는 수치가 없고 평가도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식물과 달팽이와 금붕어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한없이 밝았던 우리 얼굴도 쓰는 일로 넘어가자 다시 어두워졌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혜화동에서 출발해 오늘의 광화문까지, 과연 어떤 밤들이 무수히 흘러갔던 걸까. 세상에 이렇게 좋은 소설들이 많은데 과연 나까지 이 어려운 작업을 해야 하나 싶다는 말이 나왔고 나 역시 거기에 동의했다. 아무리 오래 해도 떨칠 수 없는 두려움, 매일 백지 앞에 앉아 있으면서 매번 도망가고 싶었던 순간들, 점점 더 나빠지는 출판 시장과 줄어드는 독자들. 나는 한 선배 소설가가 “이 일에는 축적이 없다”고 한 말을 거의 매일 떠올리며 살고 있었다. 나만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야말로 불분명한 불안과 공포로부터 스스로를 구해내기 때문이다.
“그래도 사실 글 잘 풀릴 때가 제일 행복하지 않냐?”
집으로 갈 때가 되자 K가 좀 겸연쩍게 웃으며 말했다. 그 또한 당연히 맞는 말이라서 우리는 한참 괴로움을 토로하다가 같이 웃어버렸다.
집으로 돌아와 그날의 대화를 차근차근 떠올려보았다. 거의 삼사년 만에 만나는 것이었는데도 어제 본 사람들처럼 친근했고 많은 시간이 흐른 듯했는데 사실상 서로가 보내고 있는 일상은 같았다. 우리는 무엇이든 돌보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었다. 글쓰기가 가져오는 스트레스가 덜하거나 사라질 리가 없다는 사실을 이제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글을 써보기 위해 밤마다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Y는 일상의 모든 일을 처리하고 자기 방으로 들어와 글을 쓰기 위해 컴퓨터를 세팅할 때 자기 자신으로 돌아온 충만감을 느낀다고 했다. K는 곧 장편을 탈고하겠다고 계획을 세웠다. 나는 이렇게 셋이 앉아 있는 조용한 카페 풍경을 오래도록 기억하겠구나 생각했다. 처음 소설을 ‘애호’했다가 너무 사랑한 나머지 그것을 행하는 사람들이 된 우리의 2021년을, 그러니 소설이 주는 기쁨뿐만 아니라 그것을 행함으로써 일어나는 모든 평가와 좌절과 어떤 지긋지긋함까지 수용해야 한다는 걸 비로소 알게 된 우리의 사십대를.
내 발코니 식물들은 겨울을 어느 때보다 무사히 활기차게 맞이하고 있다. 혹시 아파트에 사는 식물들에게는 계절이 조금씩 느리게 찾아오는 것이 아닐까 싶을 만큼. 그래서 식물들에게는 지금이 에너지를 비축하기 좋은 늦가을쯤이 아닐까 싶을 만큼. 이번 마감이 끝나면 베고니아와 몬스테라들을 정리해 물꽂이를 늘려야겠다고 생각한다. 너무 무성하게 자라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그 여릿여릿한 매력은 다 잃어버린 파티오라금도. 그날 다음번에 만나면 물꽂이한 식물들을 나눠 주겠다는 내 말은 절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우리의 내일을 기약한 말이었다. 겨울햇살 아래 자기 잎을 계속 틔우는 식물들처럼 금붕어처럼 혹은 달팽이처럼 그때도 ‘쓰는 인간’으로 살고 있을 우리의 궁금할 것도 없는 미래에 대한, 그것은 일종의 축원이었다.
김금희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