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ESC

[ESC] 알프스가 만든 천국의 맛은, 결국 ‘전통’이었네

등록 2021-12-16 10:06수정 2021-12-16 10:15

이탈리아 피에몬테 미식 여행

귀한 화이트트러플, 바롤로·바르바레스코 와인으로 유명
피에몬테 토착 포도종 네비올로로 만든 왕과 여왕의 술
식당마다 트러플 보관 금고…향에 마음과 몸 녹아내려
이탈리아 피에몬테주 토착 품종 네비올로를 키우는 바르바레스코의 포도밭. 멀리 알프스산맥이 보인다. 홍신애 제공
이탈리아 피에몬테주 토착 품종 네비올로를 키우는 바르바레스코의 포도밭. 멀리 알프스산맥이 보인다. 홍신애 제공

이탈리아는 자타 공인 미식의 나라다. 서양 음식 문화의 본류라고 불러도 무리가 없다. 한국과 같은 반도 지형인 이탈리아는 북쪽으로는 알프스산맥, 남쪽으로는 삼면이 바다와 닿아 있다. 육해공을 망라한 풍부한 음식 재료가 미식의 나라를 만든 밑바탕이다. 특히 이탈리아 북동부에 있는 피에몬테주는 세계 최고 진미 가운데 하나인 트러플(송로버섯), 특히 그 가운데서도 더 고급으로 인정받는 화이트 트러플의 원산지로 유명하다. 와인은 어떤가. 만화 <신의 물방울>에서 “우주”라고 표현한 바롤로와 풍부하고 우아한 맛으로 이름난 바르바레스코가 바로 피에몬테에서 난다. 이렇듯 세계 최고의 음식이 모여 있는 곳이지만 로마나 피렌체 위주로 관광을 가는 한국인에게 피에몬테는 다소 낯설 수 있다. 여행길이 막힌 요즘에는 더더욱 가기 어려운 곳이다.

때마침 11월 말 요리연구가 홍신애씨가 피에몬테로 미식 여행을 떠난다는 소식을 들었다.(코로나19 오미크론 변이 발견 전이다.) 그에게 급하게 원고를 청탁해, 독자 여러분께 피에몬테의 생생한 맛을 전할 수 있게 됐다.

홍신애 요리연구가가 네비올로 포도를 맛보고 있다. 홍신애 제공
홍신애 요리연구가가 네비올로 포도를 맛보고 있다. 홍신애 제공

지난달, 토스카나와 함께 이탈리아의 양대 와인 산지로 꼽히는 피에몬테주에 다녀왔다. 피에몬테는 고급 식재료의 대명사인 트러플, 그중에서도 귀한 화이트 트러플의 주산지이기도 하다. 끝도 없이 이어진 포도밭, 언덕 위에 올라선 빨간 기와지붕의 단정한 건물들, 그 사이를 여유롭게 드라이브하며 매일 다른 식당을 찾아다녔다. 피에몬테를 대표하는 바롤로, 바르바레스코 와인과 함께 갓 수확한 트러플을 듬뿍 올린 파스타를 끼니마다 맛봤다. 어느 와이너리에 가도 어떤 식당에 가도 재미있는 공통점을 금세 발견할 수 있었다. 두가지였다. 재료 본연의 맛을 이끌어내는 담백한 요리와 양조, 그리고 오래된 것에 대한 존중. 낡았다고 답답하다고 늘 불평들을 해대지만 결국 전통에 미래가 있다는 단순한 진리를 이탈리아 북부의 시골 마을을 돌아다니며 다시금 깨달았다.

_______
안개 속 포도 한 송이, 네비올로

피에몬테는 직역하면 ‘산의 발’, 그러니까 산의 끝자락이란 뜻이다. 산은 당연히 알프스를 말한다. 프랑스, 스위스와 국경을 나누는 알프스산맥은 피에몬테로 내려오며 완만한 구릉지대를 형성한다. 봉긋 솟은 언덕과 비탈마다 가지런히 정리된 포도밭이 뒤덮고 있다. 고개를 들어 시선을 멀리 던지면 흰 눈을 뒤집어쓴 알프스의 산봉우리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피에몬테의 주요 와인 산지인 알바 지역에 머물며 주변 풍경을 바라볼 때마다 꼭 영화 포스터나 달력 사진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알바 근처에서 생산되는 바롤로, 바르바레스코 와인은 토스카나의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와 함께 이탈리아 최고급 와인으로 꼽힌다. 토스카나의 와인메이커들이 일찌감치 카베르네 소비뇽, 메를로 등 프랑스 품종을 들여오고 양조기법을 바꾸며 ‘슈퍼 토스카나’라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반면, 바롤로와 바르바레스코는 여전히 토착 품종인 네비올로 100%를 고집하면서도 세계 시장에서 ‘명품’의 지위가 굳건하다.

피오 체사레 와이너리 지하 저장고에 보관 중인 오래된 바롤로와 바르바레스코. 홍신애 제공
피오 체사레 와이너리 지하 저장고에 보관 중인 오래된 바롤로와 바르바레스코. 홍신애 제공

네비올로는 안개를 뜻하는 네비아에서 온 이름이다. 과연 동틀 녘 안개 자욱한 포도밭은 절경이었다. 바르바레스코 지역에 속하는 트리소 마을의 한 포도밭에서 아침 산책을 하다 가지에 매달려 있는 네비올로 한 송이를 발견하고 송이째 덥석 깨물었다. 알갱이는 작았지만 달콤한 과즙이 입안 가득 흘러넘쳤다. 네비올로는 일찍 꽃 피우고 수확은 늦게 하는 품종이라 당도와 산도가 모두 높고 탄닌도 강한 풀바디 느낌의 와인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원재료의 특성이 분명한 술인 셈이다.

그런데 차로 불과 30분 거리인 바롤로와 바르바레스코 와인의 맛은 천지 차이다. 같은 포도를 거의 유사한 양조기법(최소 숙성 기간이 바롤로는 3년, 바르바레스코는 2년)으로 빚는데도 그렇다. 흔히 바롤로를 와인의 왕에 비유하고, 바르바레스코는 여왕의 품격에 빗댄다. 식사 때마다 두 와인을 비교하며 마셔봐도 바롤로는 강직하면서도 시간이 지날수록 힘이 느껴지고, 바르바레스코는 수줍은 향기로 시작해 꽃밭 한가운데 있는 느낌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고도와 지형, 일조량과 흙의 성질 등 ‘테루아르’의 작은 차이가 커다란 맛의 결과로 나타난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피에몬테의 자랑인 화이트 트러플. 크기가 주먹만 하다. 홍신애 제공
피에몬테의 자랑인 화이트 트러플. 크기가 주먹만 하다. 홍신애 제공

_______
‘억’ 소리 나게 비싸지만…

알바는 와인 못지않게 트러플로도 유명한 동네다. 그것도 화이트 트러플이다. 이 지역 사람들은 ‘블랙 트러플은 돼지나 먹는 것’이라고 말한다니 이 특산품에 대한 자부심이 어느 정도인지 알 만하다. 트러플은 10월 말부터 11월에 걸쳐 수확한다. 마침 수확철을 맞아 거리 곳곳에서는 화이트 트러플 축제를 알리는 홍보물이 쉽게 눈에 띄었다. 알바 시내는 생각보다 작았다. 두 발로 샅샅이 훑었다. 조금 과장해서 서너 집 건너 한 집마다 트러플을 팔았다. 치즈나 육가공품, 올리브유 등에 혼합한 제품도 흔했다. 특유의 향이 발길 닿는 곳마다 코를 들뜨게 했다.

트러플은 땅속에 박혀 자라는 종균 형태의 덩어리 버섯이기 때문에 생으로 얇게 저미거나 다져서 먹는다. 눈앞에서 갈았을 때 풍기는 압도적인 향에 놀라고, 밝은색의 종잇장 같은 단면을 눈으로 즐기며, 입안에서 머릿속까지 울려 퍼지는 맛을 천천히 음미하는 음식이다. 여기에 쌀이나 달걀, 고기 등의 재료가 요리에 곁들여지면 조화롭게 입안에서 변화되는 놀라운 과정을 경험할 수 있다.

화이트 트러플을 올린 타야린. 홍신애 제공
화이트 트러플을 올린 타야린. 홍신애 제공

이 귀한 트러플을 다루는 대부분의 주방에는 트러플용 금고가 상비돼 있다. 쌀이나 소금에 트러플을 묻어 수분으로부터 보호하거나 전용 나무통을 짜서 조심스레 다룬다. 일주일 이상 보관이 어렵기 때문에 손님에게 선보이는 것도 신중히 한다. 일단 공기를 쐬면 끝이다. 향이 날아가버리기 때문이다. 그날 오픈한 트러플은 그날 다 팔아야 한다는 부담이 있다.

올해는 기후 변화가 심해 트러플 작황도 좋지 못했다고 한다. 예년보다 오른 가격은 10g에 55유로, 우리 돈으로 7만원이 훌쩍 넘었다. 이것도 단골손님에게 내미는 소매점 가격이고, 음식점에선 곱절은 더 비싸다. 20~30유로쯤 하는 파스타나 리소토 위에 트러플을 올려 먹으려면 40~50유로를 추가로 내야 했다. 얇은 대패 같은 칼에 일고여덟번 갈아낸 화이트 트러플은 3~4g쯤 돼 보였다. ‘송이버섯은 저리 가라네….’ 투덜대는 사이 코끝으로 파고드는 향에 아찔했다. 왜 이 버섯을 최음제로, 유혹의 도구로까지 사용했다는지 알 것 같았다. 여태 맛본 블랙 트러플보다 훨씬 여리여리하면서 혀끝에서 녹아내리며 끝까지 향기를 잃지 않는 우아함이 있었다. 멀리까지 와서 비싼 돈 주고 사 먹을 가치가 있다고 할까.

_______
피에몬테에서 느낀 평양음식

이탈리아 파스타는 간이 세고 면이 딱딱하다는 선입견을 가진 이들이 많은 줄 안다. 그런 분들께 피에몬테의 파스타를 드셔보라고 하고 싶다. 색이 진한 노른자를 듬뿍 풀어 손으로 반죽해 칼국수처럼 칼로 썰고 삶아서 버터에 버무려 먹는 타야린(피에몬테에서 즐겨 먹는 얇고 긴 면 파스타), 포르치니 버섯과 쇠고기, 치즈 등을 채워 넣고 작게 빚는 피에몬테식 라비올리(이탈리아식 만두) 아뇰로티, 쌀 주산지답게 고소하고 향이 좋은 쌀에 치즈나 버터만 간단히 섞어 만드는 리소토까지. 무얼 선택해도 좋다.

파르미자노레자노 치즈로 간단히 맛을 낸 리소토. 홍신애 제공
파르미자노레자노 치즈로 간단히 맛을 낸 리소토. 홍신애 제공

피에몬테식 라비올리(이탈리아식 만두) 아뇰로티. 홍신애 제공
피에몬테식 라비올리(이탈리아식 만두) 아뇰로티. 홍신애 제공

채소, 고기, 해물 등 다양한 고명을 기대했다가 아무것도 없이 딸랑 면이나 쌀만 담긴 접시를 마주하면 처음엔 좀 충격이긴 하다. 요리를 하다 말고 갖다 줬나 의심이 들고 ‘이게 한 그릇에 얼마짜린데’ 본전 생각도 난다. 하지만 먹고 나면 반전이다. 평양냉면 같은 아이러니다. 먹을 땐 밍숭맹숭했는데 집에 가서 자려고 누우면 생각나는 맛. 피에몬테에서 매끼 먹은 타야린과 리소토가 그랬다. 이탈리아 음식은 짜다는 선입견도 함께 깨졌다. 이탈리아에서 ‘슴슴하다’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될 줄은 몰랐다. 재료 본연의 맛과 향에 집중하고 감칠맛을 살리는 조리법이 곳곳에서 느껴졌다. 간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 때면 치즈나 버터가 훅 들어와 감칠맛을 끌어올려줬다. 살라미(이탈리아 소시지)나 쿨라텔로(돼지 넓적다리 햄)에 쌈장 바르듯 버터를 쓱쓱 발라 먹을 때의 쾌감, 이건 도무지 잊기 힘들 것 같다.

피에몬테/홍신애 요리연구가

(코로나 방역수칙을 철저하게 준수하며 취재·작성한 기사입니다.)

살라미를 자르는 요리사. 홍신애 제공
살라미를 자르는 요리사. 홍신애 제공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ESC 많이 보는 기사

결혼을 약속한 남친이 있는데 다른 남자와 자고 싶어요 1.

결혼을 약속한 남친이 있는데 다른 남자와 자고 싶어요

[ESC] 이별 후 ‘읽씹’ 당해도 연락하고 싶은 당신에게 2.

[ESC] 이별 후 ‘읽씹’ 당해도 연락하고 싶은 당신에게

[ESC] 갑자기 그만둔다는 알바 노동자, 손해배상 청구 가능할까? 3.

[ESC] 갑자기 그만둔다는 알바 노동자, 손해배상 청구 가능할까?

잎도 뿌리도 없지만…꽃 피워내며 생태계 다양성 한몫 [ESC] 4.

잎도 뿌리도 없지만…꽃 피워내며 생태계 다양성 한몫 [ESC]

깨진 그릇 수선하며 내 마음도 고칩니다 [ESC] 5.

깨진 그릇 수선하며 내 마음도 고칩니다 [ESC]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