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할리우드 히어로 영화의 새로운 경향과 고대 그리스 비극의 흐름이 닮았다는 것이 이 글의 주장이다.
만화와 영화 속 악당은 갈수록 의롭고 영웅은 갈수록 상태가 좋지 않다. 몸 튼튼 마음 튼튼 슈퍼맨은 눈길을 끌지 못한다. 마음이 어두운 배트맨이나 비뚤어진 부자 아이언맨이나 평범한 이웃 스파이더맨이 인기다. 그런데 한술 더 떠, 멋있는 범죄자 조커와 할리퀸이 더욱 인기다. 어째서 그럴까? 사회가 이렇다 정치적 올바름이 저렇다 분석이 많지만 내 생각은 이렇다. “식상한 이야기도 뒤집으면 참신하기” 때문이다.
“창의성이란 오래된 요소의 새로운 조합이다.” 이 글에서 여러차례 살펴본 웹 영의 지적이다. “착한 영웅이 착한 일을 한다”는 것은 식상한 조합, 그 나물에 그 밥이다. 반대로 “나쁜 악당이 착한 일을 한다”거나 “착한 영웅이 나쁜 일을 한다”고 하면 참신하다. 눈길을 끄는 아이러니가 있다.
그래서 요즘 창작자는 악명 높은 악당(빌런)과 유명한 영웅(히어로)을 뒤섞거나 뒤집는다. 상식을 뒤집으면 독자와 관객의 눈길을 끈다. 창작자 쪽에서는 더 손쉽게 작업할 수 있다. 세계관을 새로 세우지 않아도, 처음부터 하나하나 설명하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편한가. 이미 존재하는 ‘세계관 플랫폼’에 자기 해석과 스토리만 얹으면 되는 셈이다.
간단한 실험을 위해 코딩을 해보았다. ‘영화사를 통틀어 악명 높은 악역이 알고 보면 의로운 일을 하더라’는 스토리를 자동 생성하는 프로그램이다. 그림 속 정보무늬(QR코드)를 찍어 접속해보시길. “무시무시한 악당”과 “의로운 업적” 사이의 거리가 멀수록 둘을 갖다 맞춘 스토리는 흥미진진해진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비슷한 흐름을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도 찾을 수 있다. 선배 작가 아이스킬로스와 소포클레스는 잘 알려진 신화 대부분을 비극으로 꾸몄던 것 같다. 남아 있는 작품을 보면 비극을 아주 잘 꾸몄다. 후배 작가 에우리피데스는 어떤 작업을 해야 했을까? 에우리피데스가 ‘신화 뒤집어 보기’에 손을 댄 까닭이 그래서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악당으로 알려진 인물은 연민을 사게, 영웅으로 알려진 인물은 지질하게 그렸다. 당시 관객은 참신하다고 여겼을 터이다.
다만 인물 해석을 바꾸다 보면 전체 서사에 앞뒤가 안 맞는 부분이 생긴다. ‘알고 보면 착한 임금’이라고 고쳐 썼는데 끝에 인민에게 쫓겨난다거나 ‘알고 보면 착한 사람’인데 보통 사람들에게 두들겨 맞는다거나 하면 어색하다. 이처럼 설정이 엉키는 문제 역시 옛날부터 골칫거리였다. 신(역할을 맡은 배우)이 (기계장치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교통정리를 해주는 뜬금없는 미봉책도 있었다. 두고두고 욕을 먹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이것이다. 이런 문제가 있는데도 악당과 영웅을 뒤집는 방법은 예나 지금이나 즐겨 쓰인다. 반대되는 요소들의 조합이 신선해 보이기 때문이다.
김태권 만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