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약통을 여는 대신 작고도 완전한 기쁨을 누린 뒤 잠을 청할 것이다. 전혜린의 글을 인용하자면 이런 것들이다. 책과 음악, 커피, 포도주, 햇빛이 쏟아지는 길을 걷는 일.
불면이 아무리 심해도 졸피뎀 같은 수면제는 먹지 않는다. 이유는 전혜린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의 사인은 수면제 과다 복용이었다. 서른한살에 극단적 선택을 한 전혜린보다 내 나이가 많아지기 전까지 그는 내 우상에 가까웠지만, 그의 평전을 읽은 이후로 결심하게 되었다. 그의 글을 동경할지언정 그의 삶을 동경하진 않겠다고.
그때부터 수면제는 내게 금지된 무엇이었다. 죽음을 떠올리는 불온한 것이었고, 두려움이 호기심을 압도하는 흔치 않은 대상이었다. 전혜린을 죽음으로 몰고 간 수면제(세코날)는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졌는데도 그랬다.
수면제 얘기를 꺼냈으니 말이지만, 이런 기억이 있다. 늦은 퇴근길, 집 근처 골목이었다. 아이보리색 스포츠카 한대가 전속력으로 달려오더니 뚜벅이인 내 옷깃을 스치고는 내뺐다. 정말이지 1초라도 어긋났다면 황천길 급행열차를 탔을 각이었다. 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멍하니 있었다. 눈앞에 초현실적인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문제의 그 차가 지그재그로 폭주하는 광경이었다. 닥치는 대로 들이받아 라바콘(안전 고깔)이 펑펑 날아갔고, 건물 유리가 깨지며 굉음이 들려왔다.
한밤의 폭주는 전봇대와 충돌하고서야 끝났다. 112에 신고할 틈도 없었다. 내가 멘탈을 부여잡고 그쪽으로 가기도 전에 경찰차가 달려왔으니까. 찌그러진 문짝 사이로 끌려 나온 운전자는 만취 상태였다. 비틀비틀 몸을 못 가눌뿐더러 동공에 초점이 없었다. 이윽고 그가 내 곁을 지나가는데, 이게 웬일, 술 냄새라고는 전혀 나지 않았다. 마약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중에 경찰 출입하는 동료에게 듣기로는 수면제 과용이 원인이었다.
굳이 이런 일화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미디어에 등장하는 수면제는 충분히 사악하다. 유명 연예인들이 졸피뎀을 밀수하거나 불법 투약했다는 뉴스며, 왕따 피해를 폭로한 아이돌 멤버가 수면제에 중독돼 약 한통을 먹고도 못 잔다며 올린 에스엔에스(SNS) 피드며, 성범죄나 강력범죄에 수면제가 악용됐다는 소식이며….
에스비에스(SBS) 〈그것이 알고 싶다〉는 졸피뎀의 부작용인 일시적 완전기억상실과 몽유병, 자살 충동 등을 다루기도 했다. 졸피뎀은 현실에서 쉽게 처방되지만 한번 먹으면 끊기 어렵고, 오히려 그 양이 늘기 일쑤라는 지적이 많다. 내성 및 의존성 때문이다.
의사들은 졸피뎀도 잘만 복용하면 괜찮다고, 미국식품의약국(FDA) 승인을 받았으니 안전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잘’은 어디까지일까? 에프디에이 타령은 지루하다. 용법 및 용량만 잘 지키면 된다는 말도 지루하다. 에프디에이 약을 정량대로 복용했는데 부작용의 늪에 빠진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 사람마다 생김새가 다르듯 약의 기전이 작용하는 방식도 백인백색이다. 단 1%의 부작용도 내가 겪으면 100%가 된다. 그 말인즉슨 내가 직접 ‘마루타’가 되기 전까진 나한테 최적화된 용법 및 용량, 부작용 여부를 알 수 없다는 뜻이다. 그 과정에서 중독이라는 위험에 노출될 수 있는 만큼 대박보다는 쪽박에 가까운 실험이다.
아, 오해하진 마시라. 그렇다고 내가 약물이라면 치를 떠는 결벽주의자라거나 불면과의 전쟁을 독박으로 치르는 건 아니다. 뭐랄까, 죽도록 피곤해서 두개골이 찌릿찌릿할 때, 모래알 한 움큼이 눈꺼풀 안쪽을 헤집고 다닐 때, 광대뼈마저 서걱거리는 느낌을 받을 때, 나는 수면제 아닌 수면유도제를 먹는다.
수면제나 수면유도제나 그 나물에 그 밥 아니냐고? 내가 아는 상식을 말하자면 두가지는 엄연히 다르다. 수면제는 의사의 처방이 필요한 전문의약품이고, 수면유도제는 게보린이나 타이레놀처럼 처방전 없이 사는 일반의약품이다. 수면제는 크게 벤조디아제핀 계열과 비벤조디아제핀계열로 나뉘는데, 가장 유명하고 대중적으로 쓰이는 게 바로 비벤조디아제핀 제제 중 졸피뎀 성분이다. 일반의약품인 수면유도제는 알레르기 치료에 쓰는 항히스타민 제제가 대부분으로, 디펜히드라민과 독실아민 성분으로 나뉜다.
수면유도제라고 해도 대단히 신중하게 복용하는 편이다. 엄수하는 나만의 원칙이 있다. 내가 몇몇 시행착오(다음 연재에 쓸 계획이다) 끝에 내성과 의존성 방지를 최우선 목표로 만들었다. 첫째, 한달에 2회 이상 먹지 않는다. 연달아 며칠씩 먹지 않는 게 핵심이다. 둘째, 몇가지 제품을 번갈아 먹되, 반감기가 긴 약은 이튿날까지 몽롱하면서 두뇌 회전이 둔해질 수 있으니 휴일에만 먹는다. 반감기는 디펜히드라민이 9시간, 독실아민이 10~12시간이다. 셋째, 정량보다 적게 먹는다. 이를테면 디펜히드라민은 3/4알, 독실아민은 1/2알을 먹는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대증요법이다. 수면유도제는 증상을 잠시 완화할 뿐 근본적인 원인을 없애주지 않는다. 내가 먹는 게 전문의약품 아닌 일반의약품이라는 사실이 나를 안일하게 만들 수도, 내 불면이 그저 졸피뎀을 먹지 않아도 되는 수준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나는 지금 전혜린보다 나이를 더 먹었고, 그가 증오하던 짓―“모든 평범한 것, 사소한 것, 비굴한 것을 증오한다”―은 다 하지만, 적어도 그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삶에의 열망을 유지하며 버티고 견디는 것. 이거야말로 대단한 일 아닌가.
살려면 자야지, 잘 살려면 잘 자야지. 오늘은 약통을 여는 대신 작고도 완전한 기쁨을 누린 뒤 잠을 청할 것이다. 전혜린의 글을 인용하자면 이런 것들이다. 책과 음악, 커피, 포도주, 햇빛이 쏟아지는 길을 걷는 일. 커피와 포도주는 예전처럼 먹지 못하지만, 나머지는 못 할 이유가 없다. 오늘은 토요일이고, 한낮의 작은 순간에 집중하기에 얼마나 좋은 날인가. 좋은 날도, 그렇지 않은 날도 결국 삶의 일부일 뿐이다.
“지금 나는 아주 작은 것으로 만족한다…. 맛있는 음식 진한 커피 향기로운 포도주, 햇빛이 금빛으로 사치스럽게 그러나 숭고하게 쏟아지는 길을 걷는다는 일, 그것만으로 나는 행복하다.”(전혜린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중 ‘긴 방황’)
강나연 허프포스트코리아 편집장
이주의 ‘불면 극복’ 솔루션
1 낮에 햇볕 샤워 하기. ‘수면 호르몬’ 멜라토닌 분비가 촉진됨 ★★★★★
2 잠들기 전 뉴스 보기 금지. 뉴스는 대개 불안이나 긴장을 자극해 공포 영화 뺨치는 악영향 ★★★★☆
3 침실 조명은 가급적 붉고 어둡게. 형광등의 청색광은 멜라토닌 분비를 억제함. 적색광이면서 어두운 조명이 가장 이상적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