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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숙면하면 적게 자도 괜찮죠…하지만 그게 맘처럼 되나요?

등록 2021-07-08 04:59수정 2021-07-08 13:46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그들은 ‘아침형 인간’으로 포장된 불면증 환자임이 틀림없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강력한 인정욕구에 기반한 업무 스트레스와 압박감 때문에 새벽녘 깨곤 하지만, 다시 잠들 수 없는 일상을 반복하다 보니 그게 삶의 리듬으로 굳어진 거라고.”

지금은 비록 잠 못 자는 신세지만, 학창시절만 해도 내 별명은 ‘잠탱이’였다. 믿기지 않게도 그땐 칠판만 봐도 졸렸다. 죽어라 버텨도 상체는 연체동물처럼 허물어지기 일쑤였고, 그러다 발각되면 엎드려뻗쳐와 함께 매타작을 당했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한때는 병든 닭처럼 시도 때도 없이 자던 영혼이 이젠 잠 좀 자라고 이불을 덮어줘도 말똥말똥한 정신을 떨치지 못해 괴로워하니 말이다.

B를 오랜만에 만난 그 날도 나는 4시간을 채 못 잔 상태였다. 불면을 토로하기 무섭게 B는 내 동창이자 절친답게, 이를테면 괜한 측은지심이 담긴 표정을 짓기보다는 대놓고 웃었다. “뭐? 네가 잠을 못 자?” 6월의 어느 여름날이었고, 불면에 좋다는 제주산 감태 분말을 충동구매한 날이었으며, 아이유가 불면증에 시달린다는 기사를 보며 쓸데없는 동지애를 느낀 날이기도 했다. 와인 한 병이 바닥날 무렵, B가 뜬금없이 말했다.

“야, OOO 있잖아. 걔도 진짜 심하게 잤는데, 요즘 뭐 하고 사나 몰라.”

OOO라니? 맙소사. 나는 하마터면 와인을 뿜을 뻔했다. 전두엽이 빛의 속도로 활성화되면서 한없이 무기력해 보이던 OOO이 생각났다. OOO은 1m80㎝를 웃도는 키에 약간 살집이 있던 남자애로, 잠이 많기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공학이자 합반이던 그 학교에서 나는 자주 이렇게 불렸다. ‘여자 OOO’. 피아 구분을 칼 같이 하는 나로서는 그 말이 불쾌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나는 나고, 쟤는 쟨데 왜 자꾸 엮어? 내가 아무리 자도 쟤 정도는 아닌데, 어떻게 나를 쟤랑 도매금 취급하지? 게다가 ‘여자 OOO’이라니. 남자는 ‘남자 XXX’로 안 부르면서 여자는 왜 걸핏하면 ‘여자 XXX’인 거야? 어휴, 지겹다, 지겨워.

솔직히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걔와 엮이기 꺼려지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걔의 별명이 ‘페일(fail)’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 그 애 이마에는 흉터가 하나 있었는데, 그렇게 흉이 진 건 상처 봉합에 실패한 탓이라는 빈정거림이 담긴 별명이었다. 걔가 수업시간에 잘 때면 남자애들은 말했다. “페일이 또 페일하네.” 지금 생각하면 타인의 상처를 들쑤시는 동시에 외모를 비하하는 멸칭이었지만, 그 시절 친교를 과시한답시고 분별없는 별명을 붙이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던가. (어이, 나한테 ’무다리‘라던 자네!)

페일이 페일한다, 실패가 실패한다. 무엇이 실패고, 무엇을 실패하나. 명사이자 동사인 저 영단어는 어떤 의미로 쓰인 건가. 전자가 명사로 쓰인 멸칭일 때 후자가 동사인 것만은 아니었다. 거기엔 잠이 무가치하다는 합의가 담겨 있었다. 그랬다. 그땐 잠이 곧 실패였다. ‘사당오락(네 시간 자면 대학에 붙고, 다섯 시간 자면 떨어진다는 말)’이 진리인 시절이자, 공사 현장에서 주경야독한 끝에 서울대에 수석입학한 장승수(현 변호사)의 성공기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가 베스트셀러인 시기였다. 야간자율학습 때 잤다는 이유로 교사가 내 뺨에 풀스윙을 날리며 악다구니를 퍼부어도 그러려니 할 때였다.

“이런 @#$#%@할 XX, 어차피 죽으면 실컷 잔다. 죽고 싶냐???”

어릴 적부터 “말이 씨 된다”는 말을 귓등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서일까. 겉보기에 비과학적 믿음은 배척할 것 같은 냉소적인 이미지와 달리, 나는 무한긍정주의자까진 아니어도 ‘말의 주술성’을 곧잘 신뢰하는 편이었다. 죽겠다 죽겠다 하면 진짜 죽고, 괜찮다 괜찮다 하면 진짜 괜찮아지리라 믿었다. 그런 내가 ‘페일’로 불리는 애와 쌍둥이처럼 거론될 때 감정은 두려움이랄까, 불안이랄까, 아무튼 나로서는 그 애만큼이나 과면(과도한 졸음을 억제 못하는 상태)을 통제하지 못하면서도 있는 힘껏 그 상황을 불쾌해해야 했고, 그래야만 실패를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야말로 잠은 좋고, 실패는 싫었달까.

바야흐로 세상은 달라졌다. 수험생들은 사당오락을 강요받는 대신 숙면 제품을 조공 받고, 수면 부족을 성공을 위한 마땅한 희생으로 여기는 목소리는 비난받기에 십상이다. 역사는 깨지고 뒤집히며, 새로운 해석이 난무한다. “잠은 인생의 사치다. 하루 3~4시간이면 충분하다”고 말한 에디슨이 실제론 쪽잠을 엄청 잤다거나, 하루 4시간 수면으로 유명한 나폴레옹이 전투를 끝내자마자 한꺼번에 몰아 잤다는 뒷담화(?)가 쏟아진다. 내가 일하는 디지털매체 〈허프포스트〉를 창간한 아리아나 허핑턴이 과로로 쓰러진 후부터 수면전도사로 변신한 일화는 너무 많이 회자돼 식상할 정도다. 너도나도 꿀잠을 외쳐대니 잠을 하찮게 여기고 업신여기던 사회는 머지않아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정말 그런가?

글쎄, 시답잖은 희망일 뿐이다. 잠이 중요한 가치로 떠받들어지는 건 맞지만, 그건 결코 마음껏 자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잠을 논하는 책들을 살펴보라. 하나같이 하는 말은 잠을 퍼 자라는 소리가 아니라, 숙면하면 적게 잘 수 있다는 것이다. 숙면하라고? 그럼 적게 자도 개운하다고? 얼씨구, 공자님 말씀하고 있네. 그게 그렇게 쉬우면 난들 이러고 있겠냐 싶어 냅다 책을 던져 버리려다 아니지, 그래도 불면인으로서 이 정도는 읽어줘야지 싶어 책장을 다시 넘겨본다. 오프라 윈프리는 명상, 빌 게이츠는 독서, 일론 머스크는 카페인 줄이기 등 성공한 유명인사들이 숙면하려 노력한 정황은 많지만, 그 누구도 잠을 많이 자진 않는다.

이런 얘긴 또 어떤가. 애플 최고경영자(CEO) 팀쿡은 새벽 3시45분에 일어나고, 스타벅스 전 최고경영자 하워드 슐츠는 새벽 4시 반에 일어나며, 패션잡지 〈보그〉 미국판 편집장 안나 윈투어는 새벽 5시에 일어난다. 그들이 실제로 얼마나 양질의 수면을 하고, 잠의 총량도 얼마인진 알 수 없으나, 그들이 모두 워커홀릭인 것만은 사실이다. 짐작건대, 그들은 ‘아침형 인간’으로 포장된 불면증 환자임이 틀림없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강력한 인정욕구에 기반한 업무 스트레스와 압박감 때문에 새벽녘 깨곤 하지만, 다시 잠들 수 없는 일상을 반복하다 보니 그게 삶의 리듬으로 굳어진 거라고.

성공하려면 남들이 자는 시간에 더 많이 노력하라! 잠을 줄여서 목표에 전념하라! 불면의 신화는 지금도 유효하다. 다만 불면을 부추기는 방식이 예전보다 교묘해졌을 뿐이다. 더는 잠을 무턱대고 경멸하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뭐 어떻다는 거냐고? 나는 결국 잠을 포기했다. 분노인지 저항인지 모를 나의 과면은 고3이 되면서 완치됐고, 마침내 이 불면의 컨베이어벨트에 올라탄 나는 불면의 고통을 기꺼이 감내하는 마조히스트가 되었다. 잠은 좋고 실패는 싫다는 생각은 무한경쟁사회와 어울리지 않았다. 잠을 좋아해도 실패하지 않는 유토피아는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B와 헤어지고 돌아온 그날 밤, 취기가 있어도 잠은 오지 않았다. 수납장에서 먼지 쌓인 박스를 꺼냈다. 친구들한테 받은 편지를 모아둔 박스였다. B가 고3 때 준 쪽지도 있었다. “잠탱이가 잠을 안 자는 걸 보니 정말 정신 차렸네. 우리 모두 힘내자, 파이팅!” (기승전‘파’는 그때나 지금이나 바람직하다) 정신을 차렸다……어떻게? 남들이 잘 때 깨어 있는 방식으로. 승부욕의 노예가 되어 나 자신을 채찍질하는 방식으로. 나는 꽤 자주 생각한다. 내가 고작, 고작, 고작 이 정도밖에 안 된단 말인가! 그건 타인과의 비교를 전제로 한 생각이며, 강한 승부욕은 아이러니하게도 열등감의 발로라는 것도 알지만, 그러라지, 뭐. 그렇게라도 뭔가를 이룰 수 있다면.

여느 때처럼 잠 못 드는 밤, 나는 왠지 모를 억울함에 사무치다 이런 결론을 내린다. 평생 잘 잠을 사춘기 때 다 퍼 잤노라고. 당연히 얼빠진 농담일 뿐이다. 잠이 무슨 포인트나 적립금은 아니잖아?

강나연(〈허프포스트 코리아〉 편집장)

이주의 ‘불면 극복’ 솔루션
1. 최대한 두껍고 재미없는 책 읽기. 빌 게이츠 팁의 변형 버전 ★★★★☆
2. 나이트캡(자기 전 술 한 잔) 마시기. 화장실 자주 갈 수 있으니 맥주와 과음은 금물 ★★☆☆☆
3. 커피와 홍차 등 카페인 줄이거나 끊기. 일론 머스크의 팁이지만, 사실 불면인의 기본 ★★★☆☆
4. 자격증 따기. 수험생이 되면 잠이 저절로 쏟아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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