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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여성

[목소리, 들 2] 선택할 수 없었다, 기다림 뿐이었다

등록 2020-12-03 15:57수정 2020-12-09 18:13

6년 전 인공임신중절의 경험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건 없어
10월15일 한국여성민우회가 `낙태죄 전면폐지를 위한 필리버스터' 행사를 열었다. 사진 한국여성민우회
10월15일 한국여성민우회가 `낙태죄 전면폐지를 위한 필리버스터' 행사를 열었다. 사진 한국여성민우회

▶바로가기 : 낙태죄 폐지 특별페이지 https://www.hani.co.kr/arti/delete

지난 10월15일 한국여성민우회는 ‘낙태죄 전면폐지를 위한 필리버스터’를 열었습니다. 헌법재판소가 낙태죄가 헌법불합치하다고 결정했는데도, 정부의 낙태죄 개정안이 임신 주수와 사유에 따라 임신중지를 범죄로 규정하고 있는 것에 시민들이 모여 분노의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이날 6시간15분의 이어 말하기에는 60여명의 시민이 참여했습니다. 직접 나서 또는 영상으로 또는 편지로 임신중지와 그 권리를 말했습니다. <한겨레>는 안전하게 임신중지할 권리, 건강할 권리를 이야기하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낙태죄 폐지’ 페이지에 이어 싣습니다.

자료 제공 : 한국여성민우회

■ 목소리 2 : 박○○

6년전 즈음이었을까. 그때 만난 남자친구는 입대한지 얼마 안 된 군인이었다. 그의 첫 휴가 때 우리는 첫 성관계를 했다. 피임에 대한 준비도 전혀 없이 그는 사정을 해버렸다. 그날은 일요일이라 진료를 하는 병원이 없어 문 연 약국에 가 응급피임약 처방을 요구했으나 약사는 의사의 처방문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응급피임약은 성관계 후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복용해야 피임 효과가 높아지지만 전문의약품으로 분류돼있어 응급한 상황임에도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급한 마음에 인터넷을 뒤져보니 어떤 산부인과에서는 이런 절박함을 이용해 비급여로 5만원에서 10만원의 비용을 받고 응급피임약을 그냥 주는 경우도 허다했다. 결국 하루를 더 기다려 응급피임약을 처방받았다.

하지만 전문의약품임에도 의사는 약의 부작용이나 위험성에 대한 전문적인 정보를 안내하기는커녕 아직 48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살짝 불안하겠지만 약을 잘 먹고 생리를 안하면 다시 오라는 말 뿐이었다. 나는 덜렁 처방전 하나를 들고 급하게 약국을 찾아갔다. 약국에서도 정확한 정보를 알려주며 복약 안내는 하지 않고 토를 하거나 설사를 하면 다시 오라고 했다.

그렇게 의사의 애매한 진단과 15% 피임률에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불안에 떨며 일상을 보냈다. 다음달이 되어도 생리혈이 비치지 않았다. 속은 이상하게 메스껍고 유난히 졸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임신테스트기를 사용했다. 다음날 간 병원에서 초음파 검사를 했고 임신 5주의 진단을 받았다.

하늘이 무너져 내렸다. 진단을 내린 의사에게 원하지 않는 임신이라고 했더니 실장이라는 사람을 소개했다. 그녀는 수술비와 사후관리비를 포함해 120만원을 불렀다. 나는 경제력이 없는 취업준비생이었고 남자친구는 군인이었던지라 그 큰돈을 구할 수 없었다. 다행히 한 병원에서 사후관리비를 제외하고 60만원에 수술을 해준다고 했다.

절박했던 나는 의료진의 전문성, 수술시의 안전, 수술 후의 부작용 같은 건 고려할 여력조차 없었다. 내 사회적·경제적 조건에 따라 내가 받을 수 있는 의료서비스의 질도 그만큼 낮아졌다. 현재 직장을 다니는 내가 그때로 돌아간다면 120만원의 사후관리를 해주는 병원을 택했으리라. 현실은 여성들이 몇십만원 조차 없어 제대로 된 수술장비조차 구비되지 않은 곳에서 위험한 시술을 받거나 계단에서 구르거나 심지어는 자살을 하는 등 극단적 선택을 하도록 몰아간다.

하루라도 빨리 수술을 잡으려고 했으나 그마저도 쉽기 않았다. 남자친구가 신분증을 들고 직접 내원해서 동의서에 서명해야한다고 했다. 남자친구가 군인이라 내원하기 힘들다 했더니 병원에서는 동의서가 없으면 수술을 할 수 없다는 말만 딱 잘라 반복했다. 내 몸에 대한 통제권은 전적으로 남자친구에게 있었다. 나는 휴가를 빨리 나와 서명해달라고 남자친구에게 구걸해야했다.

남자친구가 거짓말로 둘러대고 간신히 휴가를 받아 낸건 2주 후였다. 그 사이 나는 스트레스로 하혈을 했고 의사는 유산기가 있으니 하루빨리 수술하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했다. 그를 기다리는 것 외에는 내 안전을 위한 어떤 것도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없었다. 이 모든 것에는 남자친구의 동의가 필요했다.

내 불안은 극에 달해 돈을 주고 남자친구 대행을 구해야 하나하는 생각에까지 이르렀다. 실제로 돈을 주면 직접 남자친구를 대행해주거나 연결해주는 업체들까지 있었다. 남자친구에게도 임신의 책임이 있었으나 그가 지는 책임과 고통은 일말이었고, 모든 것은 내 몫이었다. 이미 법은 날 낙태죄를 저지른 범죄자로 낙인 찍었으나 그 죄를 같이 범했음에도 법의 책임에서 벗어난 남자친구가 나중에 헤어지면 보복으로 고소하지는 않을까 이중고에 시달렸다.

위 이야기들은 내 과거의 이야기지만 현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내 이야기뿐만 아닌 대다수의 여성이 갖고 있는 이야기다. 우리는 이제까지 찬성 혹은 반대, 여성권의 결정권 그리고 태아의 생명권 이분법적인 구조로 낙태죄를 이야기해왔다. 나는 누군가의 찬반의견 따위와 상관없이 안전과 내 생명을 위해 기꺼이 불법이 되었다. 생명을 가볍게 여겨 임신중절을 결정하지 않았다. 내게는 어떠한 결정권도 오롯이 주어지지 않았다.

이제는 여성들이 임신중절을 할 수밖에 없었던 환경과 맥락들, 사회적 조건들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통해 낙태죄에 접근해야한다. 피임, 섹스, 출산, 임신중절, 양육까지 모든 논의의 주체와 책임을 여성에게 지우는 일을 멈춰야 할 것이다. 이것은 여성의 문제, 남성의 문제도 아니며 우리 모두가 관심 갖고 해결해야할 문제이다. 6년전의 이야기다. 먼 과거에도 그리고 현재에도 여성들에게 닥친 일상의 문제이다. 낙태죄는 전면 폐지되어야 한다.

▶바로가기 : 낙태죄 폐지 특별페이지 https://www.hani.co.kr/arti/dele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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