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녀에게 엄마의 성을 물려줄 수 있다는 민법 조항이 있고, 실제 엄마의 성을 따른 가족의 이야기가 알려지면서 다양한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다. 민법의 부성주의를 바꿔달라는 청와대 국민청원글이 올라와 호응을 얻고, 청원글에 감동한 <며느라기>의 수신지 작가는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구내식당’ 이야기를 올렸다. 구내식당에서 돈가스만 메뉴로 걸어놓고 카레는 숨겨놓고 알리지도 않는 내용으로 부성주의를 비판했다. 박다해 기자가 수신지 작가를 인터뷰했다.
“점심 메뉴가 두가지고, 이를 선택할 수 있는데 막상 제대로 안내도 안 돼 있고 출근할 때 미리 점심 메뉴를 정해야 한다면 다들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을까요? 부부간 협의하에 엄마 성을 물려줄 수 있도록 하는 조항이 있지만 제대로 알려져 있지도 않고 실제로 그 조항을 따르는 것도 불편하다는 점을 많은 사람들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알리고 싶었어요.”
웹툰 <며느라기>에 이어 <곤>을 연재하고 있는 작가 수신지씨는 지난 11일 자신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구내식당’ 이야기를 담은 만화를 올렸습니다. 돈가스와 카레라는 두 메뉴가 존재하지만, 이를 제대로 알리지도 않으면서 출근할 때 미리 메뉴를 선택해야 하는 이상한 구내식당의 이야기입니다.
사실 이는 자녀가 아버지의 성을 따르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엄마의 성을 따르는 일을 예외로 두는 현행 ‘민법 781조 1항’을 빗댄 내용입니다. 부부가 협의한다는 전제하에 엄마의 성을 따를 수 있지만 이를 매우 예외적인 선택으로 여기는데다, 별도의 협의서를 추가로 제출하는 등의 절차를 마련해두고 있는 현실을 담았습니다. 또 자녀의 출생신고가 아닌 혼인신고 때 자녀가 누구의 성을 따를지 정하도록 돼 있는 현 제도에 대한 문제 제기이기도 합니다.
‘엄마 성 물려줄 수 있다’ 모르는 사람 많아
지난달 중순 <한겨레>가 ‘엄마 성’을 따르기 어려운 불합리한 현실 속 문제를 보도한 뒤, 6월29일 청와대 국민청원 누리집에는 자녀가 아빠 성을 따르도록 하는 현행 부성주의 원칙을 폐지하고 관련 민법 조항을 개정하라는 국민청원이 올라왔습니다. 수신지 작가는 지난 8일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자녀에게 엄마 성을 줄 수 있는 권리도 동등하게 보장해주세요’란 청와대 국민청원글(
바로가기)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며 “청원이 20만명을 달성하도록 홍보하고 싶어 따로 만화를 그리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개인 에스엔에스와 <곤>을 연재하는 인스타그램, 두곳에 직접 해당 국민청원에 동참해달라며 적극 홍보하기도 했습니다.
“<며느라기>를 연재할 때부터 국민청원을 홍보해달라는 요청이 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어요. 만화를 연재하는 입장에선 만화 내용이 독자들에게 이야기 그 자체로 스며들어야지 특정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드러내 강조하면 거부감을 느낄 것 같아 거절했거든요. 하지만 이 청원 내용에 대해선 저 자신도 동의했을 뿐 아니라 모두가 ‘불합리하다’고 느낄 만한 이슈라고 생각해 처음 올려봤어요. 지금 <곤>을 연재하면서도 느낀 건 ‘엄마 성을 물려줄 수도 있다’는 점 자체를 모르는 분이 정말 많다는 점이거든요.”
실제로 현재 수신지 작가가 연재 중인 <곤>에는 혼인신고 때 자녀가 엄마 성을 따르도록 하겠다고 표시한 뒤 신고한 ‘노민아-제갈경’ 부부가 등장합니다. 이 부부가 사실 진지하게 자녀의 성에 대해 토론하고 합의해서 이렇게 결정한 건 아닙니다. 특히 남편 제갈경은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었으니까 가볍게 생각하고 민아가 하자는 대로 한 것”이라며 “완전히 잊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막상 아내가 실제로 임신을 하고, 혼인신고 때 정한 대로 엄마의 성을 따르게 하겠다고 하니, “외동아들인데 나 때문에 우리 집안의 대가 끊긴다”며 고민할 시간을 달라고 요구합니다. “시기상조다” “아이가 고생한다”며 가족들의 반대에도 부딪히게 되고요.
수신지 작가는 “제갈경의 캐릭터는 사실 스스로 진보적이라고 생각하고 사회문제에 관심도 있는 남성”이라며 “혼인신고 때는 자녀가 부인의 성을 따르는 일에 기꺼이 동의하고도 막상 ‘내 이야기’가 되면 내키지 않아 하는 모습을 다루고 싶었다”고 말했습니다. 자녀의 성·본 문제를 얘기할 땐 “그 문제가 뭐가 그리 중요하냐”고 하면서도 막상 “그렇다면 엄마의 성도 자유롭게 따를 수 있도록 하자”고 하면 거부감을 나타내는 현실을 꼬집고 싶었다고도 합니다.
“‘대를 잇는 일’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는 저는 아직 잘 모르겠더라고요. 남성들도 그 효용과 가치를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다기보다 막연하게 그 권리를 뺏기기 싫은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관습을 벗어나는 일에 대한 두려움도 있을 테고요.”
그는 무엇보다 전 국민이 각자의 성을 다 가지고 있는데도 이 문제에 사람들이 이토록 무관심하다는 점에 놀랐다고 합니다. 만화 속 노민아-제갈경의 갈등을 과거 부모 성을 함께 쓰던 운동처럼 인식하고 “두 부부의 성을 같이 쓰는데 성의 순서를 가지고 다투는 걸로 이해한 경우도 많았다”고도 했습니다. 혼인·출생신고를 담당하는 공무원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만화를 준비하면서 주민센터에 직접 가서 자녀의 성을 엄마 성으로 붙여주는 걸로 바꿀 수 있는지 직접 문의했어요. 그랬더니 공무원이 ‘출생신고할 때 자녀 성을 정하는 거다’라고 안내해주는 거예요. 제가 ‘아니다, 혼인신고 때 정하는 거다’라고 했더니 ‘그럴 리 없다’고 하더라고요. 공무원분들도 이렇게 잘 모르는데, 혹시 어떤 신혼부부가 이 점을 물어봤다면 그분의 말만 듣고 얼마나 많이 (혼인신고서에) 사인을 했을까 싶더라고요.”
혼인·출생신고 담당하는 공무원도 몰라
만화 속에선 “아이가 ‘왜 엄마랑 성이 같냐’는 질문을 받는다고 상상을 해보라”는 남편 제갈경의 말에 노민아가 이렇게 답합니다. “아이가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때쯤에는 지금처럼 당연스레 아빠 성을 쓰는 세상은 아닐 거라고 믿고, 아빠 성을 따르는 걸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세상에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요.
수신지 작가의 바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이 많이 변했다고 해도 아이를 낳은 주변 친구들을 보면 여전히 똑같더라고요. 대부분 퇴사해서 전업주부가 되고, 전쟁처럼 아이를 키우고, 임신·출산부터 육아까지 오롯이 여성의 몫으로 남고요. 회사에서 야근을 할 때 아이 육아 일정을 동시에 고민하는 남성들은 여전히 소수일 테고요. 엄마 성을 동등하게 따를 수 있도록 하는 문제는 어쩌면 이렇게 가정 안에서 남녀 간 기울어져 있는 구조, 또 이를 당연하게 여기는 가치관을 바꾸는 시작점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무조건 엄마 성을 따르도록 바꾸자는 것도 아니고 단지 평등하게 선택할 수 있는 장을 만들자는 이야기잖아요. 부부가 함께 책임을 지는 일에 더 이상 여성이 주변부로 밀려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요. 아이에게 엄마 성을 물려주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더 많은 가족의 이야기가 앞으로 더 알려지길 바라고요.”
박다해 기자
doal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