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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여성

“죽겠다” 협박하던 그놈만 살았다, 가락동 스토킹살인 2년

등록 2018-04-19 08:53수정 2018-10-25 17:37

[스토킹살인은 편견을 먹고 자란다]
① 동생 잃은 언니의 깨달음
② ‘스토킹 남편’ 성폭행 신고 당일 사망한 22살 엄마
③ 자살협박하는 전 남자친구에게 살해당한 31살 여성
‘스토킹 살인은 편견을 먹고 자란다' 기획 기사는 스토킹이 어떻게 잔혹한 살해로 이어졌는지를 보여주는 세 건의 범죄 스토리를 통해 유가족과 지인들의 절박한 목소리를 전합니다. 세번째 이야기는 ‘가락동 스토킹 살인 사건’으로 널리 알려진 김정은씨의 이야기입니다. 2017년 9월 대법원이 가해자에게 무기징역을 확정했지만 정은씨의 아버지는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 이야기는 아직 진행 중인 아버지의 투쟁기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정은씨가 숨진 지 꼭 2년이 되는 날입니다.

일러스트 son of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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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에 들어서자 발바닥에 찬 기운이 올라왔다. 이 방만 보일러를 끈 모양이었다. 찬 기운이 무색하게 침대엔 한겨울용 극세사 이불이 덮여 있었다. 네 모서리를 반듯하게 맞춘 채였다. 침대를 내려다보는 맞은편 장식장도 말끔했다. 마징가 같은 프라모델(플라스틱으로 된 조립식 모형 장난감)들이 먼지 하나 없이 줄지어 서 있었다. 화장대만 딴판이었다. 누가 급하게 바르고 나간 듯 스킨이며 로션, 비비크림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고 김정은씨의 화장대. 사진 이재호 기자 ph@hani.co.kr
고 김정은씨의 화장대. 사진 이재호 기자 ph@hani.co.kr

새집에 마련된 고 김정은씨의 방. 침대 위 이불이 반듯하게 정리돼 있다. 사진 이재호 기자 ph@hani.co.kr
새집에 마련된 고 김정은씨의 방. 침대 위 이불이 반듯하게 정리돼 있다. 사진 이재호 기자 ph@hani.co.kr

“화장대는 딸이 그날 올려놓은 그대로 해놓은 거예요. 이불도 딸이 덮던 거 안 빨고 가져왔고요.” 일명 ‘가락동 스토킹 살인 사건’ 피해자 김정은(당시 31)의 아버지가 한 말이다. 김정은은 2016년 4월19일 낮 12시께 집 앞 주차장에서 전 남자친구가 휘두른 흉기에 다섯차례 찔려 그 자리에서 숨졌다.

핏자국은 쉬이 지워지지 않았다. 대신 소문이 쉬이 났다. 집이 나가질 않았다. 사건 1년6개월 만에야 새집으로 이사 왔다. 아버지는 세칸 방 가운데 하나를 딸에게 내줬다. “자리만 좀 바뀌었지, 그대로예요. 매일 청소해요. 그러다가 침대에도 한번씩 누워보고.” 아버지가 희미하게 웃었다. “지금 만지지만 못할 뿐”이라는 아버지의 말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일러스트 son of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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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기 맞은 ‘가락동 스토킹 살인 사건’

‘가락동 스토킹 살인 사건’은 ‘강남역 살인 사건’과 함께 2016년 가장 많이 회자된 여성 살해 사건이다. 당시 ‘가해자 엄벌’을 위해 피해자 가족과 재판을 지원했던 조재연 한국여성의전화 인권문화국 인권팀장은 사건의 의미를 이렇게 말했다. “보통 스토킹이라고 하면 모르는 사이거나 일방적 관계로 생각합니다. 이 사건은 데이트폭력의 연장선상에서 스토킹이 발생하고, 스토킹이 살인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심각한 범죄라는 점을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2016년 10월6일, 1심 재판부는 가해자 황민준(가명·33)에게 무기징역과 20년 동안 위치추적 전자장치 부착을 선고했다. 판결문은 “피고인은 대낮에 계획적으로 범행도구를 준비하여 피해자의 집에 찾아간 후 피고인을 피해 도망가는 피해자를 쫓아가 수차례 칼로 찔러 잔인하게 살해하였다. 피해자는 피고인과 헤어지자고 한 순간부터 살해될 때까지 피고인으로부터 온갖 협박과 스토킹에 시달리다가 피고인으로부터 당할까봐 불안해하던 가장 극단적인 피해를 당하고 말았다”고 썼다.

“제풀에 지쳐 떨어져 나갈 줄 알았지”

아버지는 “아휴, 처음엔 놀라지도 않았어요”라는 말로 2016년 3월, 딸이 죽기 한달여 전 이야기를 시작했다. 안 그래도 왜소한 딸이 살이 점점 빠졌다. 아버지는 ‘회사에서 새 일을 맡아서 힘든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난 아버지 자격도 없어요. 참 한심하죠. 알고 보니 아내는 먼저 알고 있었더라고요. 내가 위암 수술 받고 힘드니까 딸이 아빠한테는 말하지 말라고 했다더라고요.”

어머니 혼자서는 버거웠다. 결국 남편한테 ‘황민준이 헤어지고도 정은이를 괴롭힌다’고 털어놨다. 아버지는 딸을 안심시켰다. 사랑하는 관계에서 생길 수 있는 미련이라고 생각했다. “정은아, 걱정하지 마. 널 놓치기 싫어서 그러는 거야. 제풀에 지쳐 떨어져 나갈 거야.”

아버지가 직접 황민준을 달랜 적도 있다. 3월12일, 황민준이 연락도 없이 집에 찾아왔다. “내 딸은 마음이 떠난 것 같다. 너도 마음 접고 새 출발 해야지.” 그의 말에 황민준은 “이젠 안 그러겠다”며 사과하고 돌아섰다. 거짓말이었다.

어느 날부터 집 앞에 황민준의 차가 상주했다. 그가 차에 없다는 건 근처 건물에 올라가 김정은의 집을 지켜보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제야 아버지는 ‘이게 아니구나’ 싶었다. 딸의 출퇴근을 직접 챙기기 시작했다. 위암 투병을 위해 매일 나가던 자전거 운동도 끊었다. 황민준이 주변에 있는지 없는지 늘 확인해야 했다.

4월8일 김정은은 회사 동료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집 앞에 황민준 차 있어, 얘들아 무서워 ㅠㅠ”

일러스트 son of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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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에 신고 안 한 이유? 신고하면 잡아가나?”

온 가족이 모여 ‘대책 회의’를 연 것도 여러 번이었다. 아버지는 친구들한테도 딸 이야기를 했다. 결론은 ‘경찰에 신고하지 말자’였다.

“스토킹이라고 신고하면 그놈을 잡아가나요? 가끔가다 순찰은 돌겠죠. 정은이를 24시간 보호해주지도 못하잖아요. 법은 물렁하고, 신고했다가 괜히 그놈 신경만 건드릴 것 같았어요. 신고했어도 내 딸은 당했어요. 지금도 후회는 안 해요.” 스토킹 혐의가 입증되어도, 범칙금 8만원짜리 경범죄가 되는 제도를 두고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그동안 국회에 잠들어 있던 스토킹 처벌 관련 발의안도 여럿이었다. 올해 2월에야 정부는 스토킹을 징역 또는 벌금으로 형사 처벌하는 ‘스토킹처벌법’(가칭)을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언젠가는 황민준 스스로 그만둘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4월19일 아침, 김정은이 운동을 끊은 아버지의 건강을 걱정하며 말했다. “이제 얘도 생각 바꿨나봐. 아빠, 운동 다시 시작해.” 요 며칠 황민준이 보이지 않던 차였다. 아버지는 왠지 선뜻 내키지 않았지만 오랜만에 자전거를 옆에 끼고 집을 나섰다.

일러스트 son of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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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풀에 떨어져 나가겠지 했는데…
“집앞에 그의 차가 있어 무서워”
딸이 두려움에 떨자 출퇴근 챙겨
온가족 대책회의 끝 내린 결론은
“보복만 당할라…신고하지 말자”

내 딸은 피가 마르고…
끝나지 않을 ‘자살 협박’에 고통
생각 바꿨나보다며 안심했던 날
현관문 앞에 서있다 결국은 흉기로…

사죄의 말 한마디도 없었다
자살만은 막으려던 딸의 설득을
‘관계 회복 증거’라고 주장하고
“여친이 변심해서 그랬다” 발뺌
협박은 없었다며 항소 또 항소

아빠하고 오래 살겠다던 딸
스토킹은 절대 멈추지 않는다는 걸
일찍 알았으면 살릴 수 있었을까
딸 이름을 새긴 반지에 물어본다

오전 11시, 출근하려고 혼자 현관문을 열고 나오는 김정은 앞에 황민준이 서 있었다. 황민준은 힘으로 밀쳐 김정은을 집으로 끌고 들어갔다. 50분 뒤 김정은은 맨발로 집에서 뛰쳐나왔다. 곧이어 흉기를 든 황민준이 따라 나왔다. 아파트 복도 폐회로텔레비전(CCTV)에 고스란히 잡힌 그 장면을 아버지는 아직도 보지 못한다.

딸이 남긴 ‘결정적 증거’

황민준은 재판정에서 살인은 인정하면서도 ‘협박이나 스토킹은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아버지는 막막했다. 그런데 죽은 딸이 도움을 줬다. 김정은의 휴대전화에는 황민준과의 통화 내용이 녹음돼 있었다. 스토킹을 입증할 결정적 증거였다. <한겨레>는 이 녹음 파일과 카카오톡 대화 내용 전체를 입수했다.

두 사람은 2015년 6월 연애를 시작했지만, 김정은은 황민준이 지나치게 집착한다고 느꼈다. 2016년 2월 말부터 김정은은 황민준과의 관계를 고민하고 있었다.

2016년 3월2일, 황민준이 평소와 다름없는 다정한 말투로 김정은을 불러냈다. “꼭 오늘이어야 한다”고 했다. 며칠 전 빌린 돈 340만원도 돌려주겠다고 했다. 그날 밤, 황민준은 김정은을 차에 태우고 잠실대교 위로 갔다.

“나랑 헤어지려 하는 것을 알고 있어. 전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나서 죽이려고 했는데, 죽이지는 못하고 다리만 부러뜨렸지. 이번에는 실패하지 않을 거야. 나는 네가 사는 곳도 알고 가족도 알고 있고 네 직장은 물론이고 엄마 미용실이 어딘지도 알고 있어. 나한테 헤어지자고 하면 너를 포함해 네 가족까지 죽일 거야. 만약을 위해 동영상이 들어 있는 유에스비(USB)도 준비했어. 나를 신고하거나 내가 잘못되면 미국의 동생에게 유에스비 내용을 공개하라고 지시했어.”(1심 판결문 인용)

몇 시간 전까지 “빨리 보고 싶다”던 황민준은 순식간에 얼굴을 바꾸고 김정은을 “이봐요”라고 남처럼 부르며 협박했다. 말뿐만이 아니었다. 김정은이 차마 부모에게 마지막까지 말하지 못한 일이 있었다. 황민준은 김정은을 넘어뜨리고 발로 밟았다. 녹음 파일이 없었더라면 끝내 묻혔을 진실이다.

김정은은 그날 이후 실어증에 걸린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큰 소리만 들려도 바닥에 주저앉을 정도로 힘들어했다. 자기 입으로 “다신 보지 말자”던 황민준이 잠실대교 위에서의 그날 이후 9일 만인 3월11일 오후 다시 연락이 왔을 때 “벌써 다리에 힘이 풀려서, 만나기는 힘들 것 같다”고 말한 이유다.

그러자 황민준은 대뜸 “더 나쁜 생각을 할 것 같아.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자살을 암시하는 말이었다. 김정은은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황민준은 울면서 “다시 만나자”고 했다. 잠실대교 위에서 한 말은 모두 ‘거짓말’이라고 했다.

다음날에도 황민준은 김정은의 집과 회사로 무작정 찾아왔다. 김정은의 입장은 확고했다. “말보다 그 눈빛이랑 말투가… 너무 무섭고 생생해. 거짓말이라고 해도 그게 다가 아니야”, “우린 잘될 수가 없어. 그건 확실해”.

자살 협박이라는 ‘족쇄’

황민준의 자살 협박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3월12일 저녁 전화에서 “내가 죽어줘야지 나를 믿을까”, “내가 집 앞에서 죽어 있으면”, “절박함을 보여주기 위해선 죄악적 행동밖에 없다”던 그는 3월18일 새벽 전화에선 “부럽다, 나 자신을 위해서 죽겠다는 사람이 있는 게 얼마나 대단해”라고 비꼬다가 “넌 이걸 협박으로 듣겠지만 네가 나를 구원해주지 않아도 넌 행복해질 수 없어”, “나는 지금 너가 죽었다고 생각해, 나도 죽었고”라고 말하기도 했다.

“죽이겠다”는 말보다 “죽겠다”는 말이 더 강한 족쇄가 됐다. 3월19일 중학교 친구를 만난 김정은은 “날 괴롭히는 것도 두렵지만 황민준이 자살할까봐 두려워”라고 말했다. “정말로 너가 괜찮아졌으면 좋겠어. 돕고 싶어”, “나쁜 생각 하지 마, 제발”이라며 황민준과 연락을 끊지 않고 설득을 계속한 이유다. 김정은의 진심을 황민준은 “불행해도 만나주면 안 돼?”, “나는 끝을 봐야겠어”, “사랑 아니어도 상관없어”라며 내쳤다. 죽겠다던 황민준은 김정은을 죽이고 혼자 살았다.

왜 자살 협박일까. 조 팀장은 “데이트폭력에서 살해 협박보다 자살 협박이 더 많이 보인다. 자살 협박은 피해자의 관계 단절 시도를 가장 힘들게 하는 수단”이라고 지적했다. 황민준의 목적이 ‘관계 회복’이 아니라는 지적도 나왔다. 조 팀장은 “폭력의 목적은 결국 통제다. 피해자를 자신의 손아귀에 쥐고 흔들려고 하는데 (자살 협박으로도) 통제가 안 되자 복수한 것”이라고 말했다. 관계를 맺고 있는 상대의 마음 상태에 감정을 깊이 이입하는 여성들의 관여를, 스토커는 되레 통제의 도구로 이용하는 것이다.

이수정 경기대 교수(범죄심리학) 역시 황민준에 대해 “죽을병에 걸렸다며 약자 코스프레를 한 (스토킹살인 첫번째 사례) 최현승(가명)처럼, 죽겠다고 자살 협박을 한 황민준 역시 그런 종류의 약자 코스프레를 하면서 여성을 자기 소유물로 만들려는 의도를 드러냈다”며 “황민준은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이다. 애초 설득해서 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고 분석했다.

협박당하고 맞았는데 왜 연락했느냐고?

김정은이 죽고 한달 뒤 ‘강남역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아버지는 조바심이 났다. 재판 날짜는 다가오는데 딸의 죽음은 서서히 묻히고 있었다.

무작정 지역구 국회의원실을 찾아갔다. 문 잠긴 사무실 앞에서 두시간을 기다려 “도와 달라” 사정했다. 법원 앞에서 1인시위도 했다. 신문이며 방송 인터뷰도 웬만하면 다 응했다. 한국여성의전화는 공익소송 연결, 재판 모니터링, 서명운동 등으로 아버지를 옆에서 도왔다.

“황민준에게 사형을 구형해달라”는 탄원서가 3만8000장이나 모였다. 아버지는 한장도 빠짐없이 법원에 보냈다. “그때 여기저기 많이 매달렸죠. 단일 사건으론 가장 많은 탄원서가 들어왔다고 그러데요. 무기징역 선고에 도움이 됐다고 봐요. 아내와 나는 최선을 다했어요. 사형은 아니지만, 너무 괴로워하지 말자고 서로 얘기해요.”

황민준도 ‘최선’을 다했다. 변호인이 한둘이 아니었다. 자신의 행동은 스토킹이 아닌 “관계 회복을 위한 노력”이라고 주장했다. 살인 역시 김정은이 갑자기 집 밖으로 도망가자 흥분한 상태에서 우발적으로 죽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가진 것이 별로 없는 자신을 버리고 다른 남자를 만나려고 하여 자신을 화나게 했다’며 김정은에게 책임을 떠넘기기도 했다.

고 김정은씨. 사진 유가족 제공
고 김정은씨. 사진 유가족 제공
“정말로 너가 괜찮아졌으면 좋겠어. 돕고 싶어”라고 말하면서 자살 협박에 못 이겨 연락을 받아준 김정은의 마음 씀씀이를 두고 황민준은 “점점 관계가 회복되는 중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통화 녹음 파일과 카카오톡 대화 내용은 어느새 김정은이 의심을 받는 정황으로 둔갑했다. 황민준의 변호인들은 “잠실대교에서 ‘죽이겠다’는 협박을 듣고 왜 다시 만났나? 왜 다시 연락했느냐”며 반박을 해왔다.

이에 대해 조 팀장은 “모르는 사람 간에 발생한 사건 맥락으로 보면 피해자답지 않다는 건데, 이번 사건이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한 데이트폭력, 스토킹 범죄임을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더구나 애초에 ‘피해자다운’ 것은 없다.

가해자는 항소하고 또 항소했다. 2심에서도 무기징역은 유지됐지만 ‘위치추적 전자장치 부착’ 명령은 기각됐다. ‘피해자 유족을 만나거나 전화하는 등 어떠한 방법에 의한 접근도 하지 말라’는 게 애초 명령의 요지였다. 무기징역이라도 혹시 가석방이라도 되는 상황을 가족들은 우려할 수밖에 없다. 아버지는 “두려운 건 없지만, 가족들 몰살시키겠다고 한 놈 아니냐”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재판부는 마지막으로 황민준에게 사죄의 기회를 줬다. 방청석에 앉아 있던 아버지 눈길이 순간 황민준에게 꽂혔다. 황민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재판정을 떠났다. “그래도 내가 밥도 사 주고 했는데….” 아버지 마음만 복잡해졌다.

일러스트 son of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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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몰라서 내 딸을 잃었지만…”

김정은의 아버지는 언론에 많이 노출된 편이다. 이제 대법원 판결이 난 지도 반년이 넘었다. 아버지는 또 기자 앞에 섰다.

“저라고 이제 다 지난 이야기 다시 끄집어내는 게 좋겠어요? 내 말이 신문에 한줄 나오고 티브이에 나온다고 세상이 하루아침에 바뀌는 것도 아니고요. 부질없는 짓 아닌가 싶기도 하죠. 저는 스토킹이 얼마나 무서운지, 그놈이 절대 멈추지 않을 거라는 걸 몰라서 딸을 잃었어요. 이렇게 내가 말하다 보면 누가 또 말하지 않을까요? 그럼 언젠가는 스토킹 범죄가 지금처럼은 안 되지 않을까 싶어요.”

남성들에게 꼭 당부하고 싶은 이야기도 있다. “자기 행동을 스토킹이라고 생각 안 하는 게 문제예요. 상대가 원치 않는데 관계 회복을 하자? 그게 스토킹입니다.” 여성들에게도 당부를 잊지 않았다. “무조건 처음부터 알리세요. 가족한테든 친구한테든. 때리기 전에, 협박 문자 하나라도 보내면 그때 바로 말해야 해요.”

지난 2월14일 <한겨레>와 만난 김정은씨 아버지는 딸의 영문 글자를 새긴 반지를 끼고 있었다. “지금 만지지만 못할 뿐, 영원히 사랑하는” 딸을 아버지는 왼손 넷째 손가락에 두고 “죽을 때까지 몸에서 빼지 않겠다”고 말했다.  사진 이재호 기자
지난 2월14일 <한겨레>와 만난 김정은씨 아버지는 딸의 영문 글자를 새긴 반지를 끼고 있었다. “지금 만지지만 못할 뿐, 영원히 사랑하는” 딸을 아버지는 왼손 넷째 손가락에 두고 “죽을 때까지 몸에서 빼지 않겠다”고 말했다. 사진 이재호 기자

“내 딸,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아버지는 종교가 없다. 그런 그가 딸이 죽고 나서 절에 한번 찾아갔다고 했다. 스님을 만나 물었다. “저… 불교는 윤회 사상이 있다던데 저세상 가면 내 딸 한번 볼 수 있나요?”

가족끼리 반지도 맞췄다. 아들과 며느리까지 해서 모두 4개. ‘KIM JEONG EUN’이라고 딸의 영문 글자를 새겼다. “목걸이로 만들든 손가락에 끼든 몸에서 절대 빼지 말자”고 다 같이 약속했다. “시집가지 말고 아빠하고 오래 살자”는 말에 “그래, 아빠”라고 대답했던 딸은 아버지 왼손 넷째 손가락에 남았다.

김정은씨의 방을 아버지는 매일 청소한다. 깔끔히 정리된 장식장 한칸을 차지한 액자 속에서 정은씨가 웃고 있다.  사진 이재호 기자
김정은씨의 방을 아버지는 매일 청소한다. 깔끔히 정리된 장식장 한칸을 차지한 액자 속에서 정은씨가 웃고 있다. 사진 이재호 기자
김정은씨의 납골당. 사진 유가족 제공
김정은씨의 납골당. 사진 유가족 제공
아버지의 일상은 단순하다. 매일 딸 방을 청소하고, 일요일마다 딸이 있는 납골당에 간다. 이사를 왔지만 한달에 한번은 예전 살던 집 앞에 가본다. 그렇게 하루하루 지나간다. 아무 의미 없이. <끝>

* 이 기사는 지난 2월14일 김정은씨 아버지와의 인터뷰, 가해자 황민준(가명)의 판결문, 김정은과 황민준의 통화 녹음 파일과 카카오톡 대화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조재연 한국여성의전화 인권문화국 인권팀장, 이수정 경기대 교수(범죄심리학)가 도움을 주셨습니다.

*김정은씨의 사진은 스토킹 범죄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 유가족이 직접 제공하였습니다.

<참고문헌>

2016~2017년 한국여성의전화 상담 통계분석, <여성폭력 사각지대 연구>(여성가족부, 2016), <데이트폭력 피해 실태조사 결과와 과제>(손문숙·조재연, 2016), <‘데이트폭력’의 예방 및 대응관련 쟁점사항에 관한 연구>(치안정책연구소, 2016), <이슈와논점-데이트폭력방지를 위한 입법 개선의 쟁점 및 향후 과제>(국회 입법조사처, 2017), <가정폭력에 대한 경찰대응 전면쇄신을 위한 정책제안>(고미경 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2017), <요즘에도 그래요?- 숫자로 보는 한국의 성차별>(한국여성의전화, 2018)

이유진 이재호 기자 yjlee@hani.co.kr


스토커의 자살 협박, 폭력으로 인정해야

피해자엔 크나큰 공포·두려움
‘생명손실 부를 전조증상’
강력범죄 이르기 전 개입 필요

‘가락동 스토킹 살인 사건’은 스토킹의 강력범죄 발전 양상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이수정 경기대 교수(범죄심리학)는 “모든 스토킹은 생명손실의 전조증상”이라고 강조한다. 스토킹 단계에서의 처벌은 살인, 상해 등으로 발전하기 전에 개입한다는 의미도 있는 셈이다.

스토킹 초기 단계에서 공권력 개입이 필요한 이유는 또 있다. 가락동 사건에서 보듯 가해자 스스로는 결코 스토킹을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의 목적은 ‘관계 회복’이 아니라 피해자를 지배·조종·통제하고자 하는 자신의 욕구를 채우는 데 있다. “제풀에 지쳐 떨어지겠지”라는 생각이 위험한 이유다. 김정은씨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사적인 해결은 근본적으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스토킹은 보복 가능성이 크다는 점도 문제다. 이 교수는 “스토커들의 가장 큰 위험은 보복이다. 보복으로부터 긴급 구난·구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런 현실을 반영해 정부는 최근 스토킹을 경범죄에 부과하는 범칙금 수준이 아닌 벌금·징역형에 처하고 신고 현장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를 분리하는 등의 대응 방안을 내놓았다. 여성단체들은 ‘형사처벌 원칙’은 환영하면서도 경찰 현장 대응은 큰 변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조재연 한국여성의전화 인권문화국 인권팀장은 “말로만 분리가 아니라 가해자를 피해자로부터 분명하게 격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넘어야 할 산은 또 있다. 우리 사회가 스토킹 피해자가 느끼는 공포에 대한 인식이 매우 낮다는 점이다. 가락동 사건 가해자는 집요한 자살 협박으로 피해자를 압박했지만 현실에서 ‘자살 협박’은 협박으로 인정되기 어렵다. 죽이겠다는 말이나 죽이려는 행동이 아니라 자살 협박만 있어도 피해자 맥락에서 충분히 공포와 두려움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을 좀 더 넓게 인정할 필요가 있다. 흔히 폭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일들이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위험하고 고통을 더하는 일인지를 돌아보자는 이야기다.

이유진 기자 y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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