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숙 재단법인 ‘살림이’ 이사장의 집무실엔 벽난로가 있다. 기자 일행을 위해 고구마를 준비해 와 일찌감치 벽난로에 넣었다 구워 내놓았다. 남 먹이는 걸 수십년간 해왔다. 1970년대부터 민주인사들이 수도 없이 그의 집밥을 먹었다. 매년 연말 여성계 후배 수십명을 불러모아 직접 해먹이는 송년회도 유명하다. 뜨거운 솥을 자주 만져선지, 그의 엄지손가락엔 지문이 없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한겨레가 만난 사람] 박영숙 재단법인 ‘살림이’ 이사장
인터뷰/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인터뷰/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박영숙(80) 재단법인 ‘살림이’ 이사장은 내로라하는 시민사회운동계의 ‘원로’이자 ‘팔순의 현역’이다. 박 이사장은 1999년 우리나라 시민사회 최초의 공익재단인 ‘한국여성재단’을 만든 이다. ‘공익재단’이란 이름조차 생소한 때였다. 그 뒤 아름다운재단, 환경재단 등이 생기면서 공익재단 설립의 물꼬가 터졌다. 2009년에는 여성·환경·시민운동을 지원하는 재단법인 ‘살림이’를 설립했다. 이후에도 ‘살림정치 여성행동’ 설립을 제안하는가 하면, 아시아 빈곤 여성들의 자활을 돕는 ‘두런두런’을 만드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이 인터뷰는 지난달 서울 은평구 역촌동에 있는 살림이재단에서 이뤄졌는데, 그 후 그가 안철수재단 이사장으로 내정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5일 전화통화에서 그는 “아직 확정됐다고 볼 수 없다”며 말을 아꼈지만, 최근 안 원장과의 만남에 대해 “여성재단을 설립한 경험을 들려주고 격려하는 자리였다”고 전했다.
신자유주의 이후의 삶에 관심 가지고
무한경쟁서 심화된 불평등 극복해야 -80년대 정치권에 있을 때 평민당 부총재를 지냈다. 요즘 정치를 보면 남다른 감회가 있을 것 같다. “최근 타계한 김근태씨 빈소에 가서 남들이 보기 창피할 정도로 많이 울었다. 눈물을 그칠 수가 없었다. 사실 지금도 가슴이 멜 정도다. 그간 남편(민중신학자 고 안병무 전 한신대 교수), 어머니, 내가 제일 좋아했던 할머니를 여의었지만, 그때도 이렇게 내가 많이 울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내가 왜 이번에 이렇게 많이 울었을까? 그의 죽음이 너무나 원통하고 안타깝고 그랬던 게 아닌가? 남편이 살아생전 전태일과 70~80년대 시위하는 학생들을 “작은 예수”라고 했는데, 그가 살아 있었다면, 김근태를 보고는 “큰 예수”라고 했을 것이다.” -최근 정치판을 보니 더욱 심란해지는 건가? “과거 10년 동안은 우리 사회가 깨닫지 못하고, 잘못도 많이 했다. 이젠 정말 깨닫지 않았나? 올해 다른 세상을 만들 수 있다면… 그런 희망을 안고 있는 마당에 김근태씨가 가니까 너무 억울한 생각이 들더라. 게다가 시민사회에 가깝다는 사람들마저 개혁적이지도 민주적이지도 않고, 성인지성(젠더 감수성)도 너무나 부족한 모습을 보면서, 그 억울함이 내 눈물에 좀 서려 있는 거 같았다. 요즘 진보진영과 시민사회엔 정말 ‘여성’이 없다. 시민사회 사람들이 정치권에 들어가서 더 후퇴하는 걸 보면 정말 비애스럽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 “지금 사실은 진보진영이 좋은 상황에 놓였다고 생각들 하지 않나. 그러니까 너도나도 자기 이익을 취하기에 바빠 전체를 돌아보지 않는 모양새다. 김대중 전 대통령 같은 사람은, 그래도 당을 생각하고 뭔가 전체를 보면서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지금은 그런 안목이 없이 다들 자기 생각만 하고 있는 듯하다. 솔직히 개혁이나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모르겠다. 새롭게 보이는 혁신에 대한 고민이 적어 보인다.” -박원순 서울시장에게도 쓴소리를 한 것으로 안다. “박 시장도 40%를 여성으로 채운다고 하더니 희망서울 정책자문위원회 자문위원단(54명)을 꾸린 걸 보니, 여성은 10명으로 20%도 안 됐다. 내가 페이스북에 비판적으로 한 얘기를 아마도 전해 들었을 것이다. 평민당 부총재 시절에도 디제이(DJ)에게 쓴소리하는 역할은 내가 자주 맡았다. 디제이가 “박 부총재는 어떻게 내 가슴을 그렇게 아프게 하는 소리만 하느냐”고 하더라. 그래도 그건 충언이었다. 처음엔 정치 ‘정’자도 모른다며 안 들어가려 발버둥을 쳤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더라. 70년대 이후 세계적으로 학생운동권이 막 제도권으로 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던 때이기도 하다. 87년 어느 날, 동교동에서 내일 무조건 입당 기자회견을 한다고 아침에 정장을 입고 오라는 얘길 하더라. 환경운동을 하던 때라 옷을 안 산 지가 오래돼 옛날 옷을 밤새 뜯어고쳐 입고 갔다.” -2012년을 맞는 각오는 어떤가? “어느 당이건 생명존중, 복지사회, 인간존중, 성평등, 상생, 시민사회 등의 ‘살림’이라는 원칙이 살아나지 않으면 나는 단호히, 혼자라도 반기를 들겠다. 정말 국민에게 감동을 주는 정당이 나와야 한다. 특히 장기적으로 여성의 정치세력화의 내용을 바꿔가야 한다. 광우병 집회 때 촛불을 들었던 여성들을 기억하지 않나. 그들이 바로 ‘세상을 바꾸는 80% 여성들’이 아닌가. 이들을 정치세력화하고 이들이 바라는 정책을 정부가 실행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시민사회와 진보진영에 대한 애정이 크지만 비판도 아끼지 않는다. 한명숙 민주통합당 대표가 뇌물수수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자, 주위에서 다들 “고생했다” “여성정치시대가 열렸다”는 치하를 했지만 그는 “고생을 한 만큼 남성들의 정치역학에 따르지만 말고, 여성을 친구가 아니라 정치 동지라 생각하면서 정치세력화를 위해 새로운 다짐으로 나와 달라”고 특별히 당부했다고 한다. -여야 가리지 않고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국회에 다수 등원시키려 했던 게 여성계에 패착이었나? “나름 성과는 있었다고 생각한다. 100여명의 후보자를 내고, 그래서 국회에서 여성 의원을 두자릿수로 만들었다. 나경원 전 의원 등이 그때 들어간 사람들이다. 그 뒤에 많은 여성들이 여성 국회의원 몇 사람 냈다고 변화된 게 뭐가 있느냐고 이야기했다. ‘살림정치’를 만들 때도 어려움이 많았다. 여성 대표성을 가지고 국회에 들어간 이들이 그 뜻을 살리지 못한 한계는 있다. 2012년엔 잘못된 선택을 하지 말아야 한다.” -‘살림정치 여성행동’의 활동은 어떻게 되나? “몇몇 사람이 아닌 80%의 ‘보통 여성’들이 정치의식을 갖고 올바른 선택을 하도록 하는 구도로 끌고 가도록 하고 싶다. 여성들도 더 이상 신자유주의 아래서 심화된 가족이기주의에만 매몰될 것이 아니라 새로운 모습의 나라살림을 주도적으로 견인하는 추진력이 돼야 한다. 그럴 때 국민이 갈망하는 대안세력으로 거듭날 수 있다. 후보들은 정말 생명을 중시하고 더불어 행복한 세상을 꿈꾸면서 국민을 보살피는 정치 패러다임을 제시해야 한다. 남녀 가리지 않고 그런 ‘살림정치’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 누구인지 선정해 후보인증제를 활용하려고 한다. 그를 후보로 내세워 최종 당선되는 일까지 책임지고 해내는 것이 목표다. 확실한 시민후보만 있다면, 돈 안 드는 헌신적인 봉사로 자기 밥 싸갖고 다니면서도 할 수 있다.” 박 이사장은 ‘선거 그 후’를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시대 이후’의 삶에 관심을 가져야 하며, 그 고민 속에서 정치적인 투표행위가 나와야 한다는 얘기다. 그가 말하는 ‘살림정치’는 국회 진출이 당면한 현실 목표이지만, 근본은 ‘생활정치’이다. -2012년 이후라면 무엇을 말하는 건가? “지금 빛을 못 보고 있는 생태마을, 마을화폐 등을 만들어내고 있는 조직들에 주목해야 한다고 본다. 그들과 함께 장기적으로 새로운 세상을 대비하고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장기적인 운동이기 때문에 조바심은 없다. 따라서 반기를 드는 데도 겁은 없다. 일부 여성운동계가 아니라 그에 완전히 동의하지 못하는 일반인들과 함께하도록 만들어갈 생각이다. 약자들의 힘은 연대하는 데서 발휘되고, 연대를 통해 무한경쟁에서 심화된 사회적 불평등과 갈등을 극복해야 한다.” 은평구 역촌동 살림이 재단 공간의 상당 부분은 막 시작하고 있는 여성·시민단체들의 힘을 돋우는 인큐베이터 구실을 하고 있다. 여성주의 의료생협, 여성환경연대 지부, 여성관련 사회적 기업, 여성보건사업 요가센터 등이 이곳에서 사업을 만들고 힘을 키워 ‘분가’해 나가거나 지금도 그 안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원로’라고 하지만, 함께 일하는 20~30대 젊은이들과도 격의 없이 지낸다. -젊은 여성 활동가들을 위해 공익사업 인큐베이팅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 “한국여성재단 이사장을 그만두고, 여성활동가의 활동 환경을 개선하는 사업을 해보고 싶었다. 일단 설문조사를 꼼꼼하게 한 다음에 필요하다는 결정이 나면, 협동조합식의 상조회를 만들려고 한다. 특히 비혼활동가일수록 매우 필요한 제도다. 나아가 지속가능한 여성운동, 단체의 정체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단체를 지원하는 기능까지 갖는다면 더욱 좋겠다. 그래서 내 남은 시간 동안 후배들에게 이 활동이 평생직이 될 수 있는 길을 터놓고 싶다.” -한국여성재단도 첫 시민사회 공익재단이었다. “여성재단은 강원룡 목사와 논의해서 명예고문으로 여성운동가 출신인 이희호 여사(김대중 전 대통령 부인)를 모셨다. 이 선생은 내가 와이더블유시에이(YWCA)에서 일할 때 상사이기도 했다. 그 뒤 전국경제인연합회를 찾아가 사회공헌위원회의 도움을 얻어 기부시장 크기를 타진했다. 전경련의 기부가 당시 1000억원이었다. 지금은 기부시장이 2조원이나 되지만, 시민사회에 오는 돈은 2%도 되지 않는다. 장학금, 병원기부 등에는 대단히 관대한 편이지만, 공익을 위한 시민사회엔 돌아오지 않는다. 비애를 계속 느낄 수밖에 없던 건, 그 가운데서도 여성은 차별을 받더라. 훨씬 후발 주자들은 모금이 잘됐지만, 한국여성재단의 경우 매우 힘들었다. 그래서 기부문화에도 성차별이 있다는 생각을 했던 거다.” 생태마을·마을화폐 만드는 조직에 주목
그들과 함께 장기적으로 새로운 세상 대비 -아시아 여성을 돕는 ‘두런두런’은 어떤 일을 하나? “가난한 아시아 여성들을 돕기 위한 모임으로 지금 100여명의 창립 회원을 모집했다. 공정무역 활동을 여성환경연대와 하게 되면서 그들의 빈곤 현실을 알게 됐다. 마침 2010년 와이더블유시에이 연합회에서 한국여성지도자상 상금을 받아 종잣돈으로 활동을 시작할 수 있게 됐다. 이들의 경제적 자립 기반을 만들어나가는 일을 하고 있다.” -시민사회 운동의 길에 들어서는 데 남편의 영향이 있었나? “내 나이 마흔이 다 돼서 결혼했는데, 남편은 나보다 꼭 10살 위였다. 그는 가족이 생기면 남을 위하려는 여력이 없다며 결혼을 안 하려고 했다. 어머니가 암 수술 뒤 결혼을 소원하자 내 생각이 났던 거지. 서구에서 오래 공부한 이가 그런 결혼관이 어딨냐고 했다(웃음). 그는 자기 생각, 이념과 행동이 평생 일치하도록 노력한 사람이다. 남편의 눈에는 내가 그때까지 이기적으로 살아온 사람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집요하게 거듭 나에게 얘기했다. 어떻게 사느냐를 그에게 듣고 배운 바 크다. 남편이 옥고를 치른 3·1 명동사건 등을 겪으면서 나도 길거리에 나와 아들·남편을 감옥 보낸 사람들과 아픔을 함께 나누면서 남의 아픔이 내 아픔이 되는 연대의식을 갖게 됐다.” 여성의 정치세력화 내용 바꿔나가야
‘살림정치’에 가까운 후보 인증제 할것 -이희호 여사에게도 북에 보낼 털모자를 뜨도록 했다던데. “오래전부터 아는 사이다. ‘사랑의 친구들’에서 북녘에 털모자 1600개를 보냈다. 이 여사님이 김 전 대통령께서 서거하신 뒤에는 동작동에 매일 가셨다. 그래서 ‘유지를 받들어 북쪽 사람 돕는 걸 해야 한다, 우린 뜨개질 선수잖아요’라고 권했다. 나도 나중에 보니 500개나 짰다는 거 아니겠나(웃음).” -팔순에도 여전히 동시에 많은 일을 하는 것 같다. “일을 많이 하진 않는데, 어느 시기나 상황에서 꼭 해야 하는 일을 피하지 않다 보니 일을 맡게 되고, 맡으면 책임을 져야 하니 계속 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런 내가 나도 썩 마음에 안 들지만, 여전히 현장에서 일할 수 있는 건강만큼은 늘 감사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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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딸바보’ 아빠들, ‘바보 아빠’ 안 되려면…
무한경쟁서 심화된 불평등 극복해야 -80년대 정치권에 있을 때 평민당 부총재를 지냈다. 요즘 정치를 보면 남다른 감회가 있을 것 같다. “최근 타계한 김근태씨 빈소에 가서 남들이 보기 창피할 정도로 많이 울었다. 눈물을 그칠 수가 없었다. 사실 지금도 가슴이 멜 정도다. 그간 남편(민중신학자 고 안병무 전 한신대 교수), 어머니, 내가 제일 좋아했던 할머니를 여의었지만, 그때도 이렇게 내가 많이 울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내가 왜 이번에 이렇게 많이 울었을까? 그의 죽음이 너무나 원통하고 안타깝고 그랬던 게 아닌가? 남편이 살아생전 전태일과 70~80년대 시위하는 학생들을 “작은 예수”라고 했는데, 그가 살아 있었다면, 김근태를 보고는 “큰 예수”라고 했을 것이다.” -최근 정치판을 보니 더욱 심란해지는 건가? “과거 10년 동안은 우리 사회가 깨닫지 못하고, 잘못도 많이 했다. 이젠 정말 깨닫지 않았나? 올해 다른 세상을 만들 수 있다면… 그런 희망을 안고 있는 마당에 김근태씨가 가니까 너무 억울한 생각이 들더라. 게다가 시민사회에 가깝다는 사람들마저 개혁적이지도 민주적이지도 않고, 성인지성(젠더 감수성)도 너무나 부족한 모습을 보면서, 그 억울함이 내 눈물에 좀 서려 있는 거 같았다. 요즘 진보진영과 시민사회엔 정말 ‘여성’이 없다. 시민사회 사람들이 정치권에 들어가서 더 후퇴하는 걸 보면 정말 비애스럽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 “지금 사실은 진보진영이 좋은 상황에 놓였다고 생각들 하지 않나. 그러니까 너도나도 자기 이익을 취하기에 바빠 전체를 돌아보지 않는 모양새다. 김대중 전 대통령 같은 사람은, 그래도 당을 생각하고 뭔가 전체를 보면서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지금은 그런 안목이 없이 다들 자기 생각만 하고 있는 듯하다. 솔직히 개혁이나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모르겠다. 새롭게 보이는 혁신에 대한 고민이 적어 보인다.” -박원순 서울시장에게도 쓴소리를 한 것으로 안다. “박 시장도 40%를 여성으로 채운다고 하더니 희망서울 정책자문위원회 자문위원단(54명)을 꾸린 걸 보니, 여성은 10명으로 20%도 안 됐다. 내가 페이스북에 비판적으로 한 얘기를 아마도 전해 들었을 것이다. 평민당 부총재 시절에도 디제이(DJ)에게 쓴소리하는 역할은 내가 자주 맡았다. 디제이가 “박 부총재는 어떻게 내 가슴을 그렇게 아프게 하는 소리만 하느냐”고 하더라. 그래도 그건 충언이었다. 처음엔 정치 ‘정’자도 모른다며 안 들어가려 발버둥을 쳤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더라. 70년대 이후 세계적으로 학생운동권이 막 제도권으로 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던 때이기도 하다. 87년 어느 날, 동교동에서 내일 무조건 입당 기자회견을 한다고 아침에 정장을 입고 오라는 얘길 하더라. 환경운동을 하던 때라 옷을 안 산 지가 오래돼 옛날 옷을 밤새 뜯어고쳐 입고 갔다.” -2012년을 맞는 각오는 어떤가? “어느 당이건 생명존중, 복지사회, 인간존중, 성평등, 상생, 시민사회 등의 ‘살림’이라는 원칙이 살아나지 않으면 나는 단호히, 혼자라도 반기를 들겠다. 정말 국민에게 감동을 주는 정당이 나와야 한다. 특히 장기적으로 여성의 정치세력화의 내용을 바꿔가야 한다. 광우병 집회 때 촛불을 들었던 여성들을 기억하지 않나. 그들이 바로 ‘세상을 바꾸는 80% 여성들’이 아닌가. 이들을 정치세력화하고 이들이 바라는 정책을 정부가 실행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시민사회와 진보진영에 대한 애정이 크지만 비판도 아끼지 않는다. 한명숙 민주통합당 대표가 뇌물수수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자, 주위에서 다들 “고생했다” “여성정치시대가 열렸다”는 치하를 했지만 그는 “고생을 한 만큼 남성들의 정치역학에 따르지만 말고, 여성을 친구가 아니라 정치 동지라 생각하면서 정치세력화를 위해 새로운 다짐으로 나와 달라”고 특별히 당부했다고 한다. -여야 가리지 않고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국회에 다수 등원시키려 했던 게 여성계에 패착이었나? “나름 성과는 있었다고 생각한다. 100여명의 후보자를 내고, 그래서 국회에서 여성 의원을 두자릿수로 만들었다. 나경원 전 의원 등이 그때 들어간 사람들이다. 그 뒤에 많은 여성들이 여성 국회의원 몇 사람 냈다고 변화된 게 뭐가 있느냐고 이야기했다. ‘살림정치’를 만들 때도 어려움이 많았다. 여성 대표성을 가지고 국회에 들어간 이들이 그 뜻을 살리지 못한 한계는 있다. 2012년엔 잘못된 선택을 하지 말아야 한다.” -‘살림정치 여성행동’의 활동은 어떻게 되나? “몇몇 사람이 아닌 80%의 ‘보통 여성’들이 정치의식을 갖고 올바른 선택을 하도록 하는 구도로 끌고 가도록 하고 싶다. 여성들도 더 이상 신자유주의 아래서 심화된 가족이기주의에만 매몰될 것이 아니라 새로운 모습의 나라살림을 주도적으로 견인하는 추진력이 돼야 한다. 그럴 때 국민이 갈망하는 대안세력으로 거듭날 수 있다. 후보들은 정말 생명을 중시하고 더불어 행복한 세상을 꿈꾸면서 국민을 보살피는 정치 패러다임을 제시해야 한다. 남녀 가리지 않고 그런 ‘살림정치’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 누구인지 선정해 후보인증제를 활용하려고 한다. 그를 후보로 내세워 최종 당선되는 일까지 책임지고 해내는 것이 목표다. 확실한 시민후보만 있다면, 돈 안 드는 헌신적인 봉사로 자기 밥 싸갖고 다니면서도 할 수 있다.” 박 이사장은 ‘선거 그 후’를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시대 이후’의 삶에 관심을 가져야 하며, 그 고민 속에서 정치적인 투표행위가 나와야 한다는 얘기다. 그가 말하는 ‘살림정치’는 국회 진출이 당면한 현실 목표이지만, 근본은 ‘생활정치’이다. -2012년 이후라면 무엇을 말하는 건가? “지금 빛을 못 보고 있는 생태마을, 마을화폐 등을 만들어내고 있는 조직들에 주목해야 한다고 본다. 그들과 함께 장기적으로 새로운 세상을 대비하고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장기적인 운동이기 때문에 조바심은 없다. 따라서 반기를 드는 데도 겁은 없다. 일부 여성운동계가 아니라 그에 완전히 동의하지 못하는 일반인들과 함께하도록 만들어갈 생각이다. 약자들의 힘은 연대하는 데서 발휘되고, 연대를 통해 무한경쟁에서 심화된 사회적 불평등과 갈등을 극복해야 한다.” 은평구 역촌동 살림이 재단 공간의 상당 부분은 막 시작하고 있는 여성·시민단체들의 힘을 돋우는 인큐베이터 구실을 하고 있다. 여성주의 의료생협, 여성환경연대 지부, 여성관련 사회적 기업, 여성보건사업 요가센터 등이 이곳에서 사업을 만들고 힘을 키워 ‘분가’해 나가거나 지금도 그 안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원로’라고 하지만, 함께 일하는 20~30대 젊은이들과도 격의 없이 지낸다. -젊은 여성 활동가들을 위해 공익사업 인큐베이팅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 “한국여성재단 이사장을 그만두고, 여성활동가의 활동 환경을 개선하는 사업을 해보고 싶었다. 일단 설문조사를 꼼꼼하게 한 다음에 필요하다는 결정이 나면, 협동조합식의 상조회를 만들려고 한다. 특히 비혼활동가일수록 매우 필요한 제도다. 나아가 지속가능한 여성운동, 단체의 정체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단체를 지원하는 기능까지 갖는다면 더욱 좋겠다. 그래서 내 남은 시간 동안 후배들에게 이 활동이 평생직이 될 수 있는 길을 터놓고 싶다.” -한국여성재단도 첫 시민사회 공익재단이었다. “여성재단은 강원룡 목사와 논의해서 명예고문으로 여성운동가 출신인 이희호 여사(김대중 전 대통령 부인)를 모셨다. 이 선생은 내가 와이더블유시에이(YWCA)에서 일할 때 상사이기도 했다. 그 뒤 전국경제인연합회를 찾아가 사회공헌위원회의 도움을 얻어 기부시장 크기를 타진했다. 전경련의 기부가 당시 1000억원이었다. 지금은 기부시장이 2조원이나 되지만, 시민사회에 오는 돈은 2%도 되지 않는다. 장학금, 병원기부 등에는 대단히 관대한 편이지만, 공익을 위한 시민사회엔 돌아오지 않는다. 비애를 계속 느낄 수밖에 없던 건, 그 가운데서도 여성은 차별을 받더라. 훨씬 후발 주자들은 모금이 잘됐지만, 한국여성재단의 경우 매우 힘들었다. 그래서 기부문화에도 성차별이 있다는 생각을 했던 거다.” 생태마을·마을화폐 만드는 조직에 주목
그들과 함께 장기적으로 새로운 세상 대비 -아시아 여성을 돕는 ‘두런두런’은 어떤 일을 하나? “가난한 아시아 여성들을 돕기 위한 모임으로 지금 100여명의 창립 회원을 모집했다. 공정무역 활동을 여성환경연대와 하게 되면서 그들의 빈곤 현실을 알게 됐다. 마침 2010년 와이더블유시에이 연합회에서 한국여성지도자상 상금을 받아 종잣돈으로 활동을 시작할 수 있게 됐다. 이들의 경제적 자립 기반을 만들어나가는 일을 하고 있다.” -시민사회 운동의 길에 들어서는 데 남편의 영향이 있었나? “내 나이 마흔이 다 돼서 결혼했는데, 남편은 나보다 꼭 10살 위였다. 그는 가족이 생기면 남을 위하려는 여력이 없다며 결혼을 안 하려고 했다. 어머니가 암 수술 뒤 결혼을 소원하자 내 생각이 났던 거지. 서구에서 오래 공부한 이가 그런 결혼관이 어딨냐고 했다(웃음). 그는 자기 생각, 이념과 행동이 평생 일치하도록 노력한 사람이다. 남편의 눈에는 내가 그때까지 이기적으로 살아온 사람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집요하게 거듭 나에게 얘기했다. 어떻게 사느냐를 그에게 듣고 배운 바 크다. 남편이 옥고를 치른 3·1 명동사건 등을 겪으면서 나도 길거리에 나와 아들·남편을 감옥 보낸 사람들과 아픔을 함께 나누면서 남의 아픔이 내 아픔이 되는 연대의식을 갖게 됐다.” 여성의 정치세력화 내용 바꿔나가야
‘살림정치’에 가까운 후보 인증제 할것 -이희호 여사에게도 북에 보낼 털모자를 뜨도록 했다던데. “오래전부터 아는 사이다. ‘사랑의 친구들’에서 북녘에 털모자 1600개를 보냈다. 이 여사님이 김 전 대통령께서 서거하신 뒤에는 동작동에 매일 가셨다. 그래서 ‘유지를 받들어 북쪽 사람 돕는 걸 해야 한다, 우린 뜨개질 선수잖아요’라고 권했다. 나도 나중에 보니 500개나 짰다는 거 아니겠나(웃음).” -팔순에도 여전히 동시에 많은 일을 하는 것 같다. “일을 많이 하진 않는데, 어느 시기나 상황에서 꼭 해야 하는 일을 피하지 않다 보니 일을 맡게 되고, 맡으면 책임을 져야 하니 계속 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런 내가 나도 썩 마음에 안 들지만, 여전히 현장에서 일할 수 있는 건강만큼은 늘 감사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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