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진씨가 지난 30일 자신의 SNS에서 출산 소식을 알렸다. 사진 김규진씨 ‘X’(옛 트위터)
“진통이 너무 아파서 이러다 저승에 가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였는데 지금은 괜찮아요. 저와 라니 모두 건강합니다.”
동성 부부로는 국내 최초로 임신 사실을 공개한 김규진(31)·김세연(34)씨가 30일 새벽 4시 30분께 3.2㎏으로 딸 ‘라니’(태명)를 낳았다. 당초 예정일보다 일주일가량 당겨진 출산이다.
규진씨는 31일 오전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갑자기 통증이 생겨 병원을 찾았더니 의사가 오늘 낳을 것인지 내일 낳을 건지 묻더라고요. 라니도 저를 닮아 성격이 급한가 봐요”라고 말하며 웃었다.
태명 ‘라니’는 규진씨 부부 친구가 꿔준 태몽에서 따왔다. 꽃은 동양란, 잎은 서양란의 모습을 한 난초가 온실 중앙에 놓인 꿈이었다. 규진씨 부부는 2019년 5월 미국 뉴욕에서 혼인신고를 하고, 같은 해 11월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출산 뒤 규진씨는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오출완’(오늘 출산 완료)라는 글과 함께 엄지를 들어 올리는 사진을 올렸다. 규진씨는 “유난 떨지 말고 쿨하게 출산했다는 글을 올려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출산 뒤 누워 있으니까 ‘엄지 척’한 사진을 올리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출완’이라는 문구는 작년에 임신을 준비할 때부터 미리 생각해뒀고요”라고 설명했다.
라니는 규진씨를 많이 닮았다고 한다. 규진씨는 “저랑도 닮았는데, 제 남동생과 특히 닮아서 남동생에게 ‘내가 딸로 너를 낳았다’고 했어요”라고 말하며 웃었다. “눈 감고 뜨는 게 규진이랑 똑같아요”라며 옆에서 세연씨가 대화를 거들었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 “병원 사람들이 저랑도 닮았대요.”(웃음)
김규진(오른쪽)씨와 배우자 김세연(왼쪽)씨가 규진씨의 출산을 앞두고 만삭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밀럽프로젝트 @milleloveproject
출산 과정은 순조로웠다. 규진씨는 세연씨가 근무하는 병원에서 출산했는데, 병원 관계자들은 이 두 사람의 결혼과 출산을 ‘특별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병원 서류에 규진씨와 세연씨의 관계를 꼬박꼬박 ‘배우자’라고 작성하기도 했다.
직접 분만실에서 탯줄을 자른 세연씨가 “모모(엄마엄마) 파트너인 우리를 대할 때 병원 관계자들이 당황하지 않고 잘해줬어요”라고 말하자, 규진씨는 “병원에서 누구도 우리 두 사람의 출산에 대해 코멘트를 하거나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라니도 이런 세상에서 살면 좋겠어요”라고 덧붙였다.
엄마 두 명이 ‘라니’에게 갖는 바람은 하나다.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규진씨는 “라니가 너무 작아서, ‘이 조그마한 생명체를 어떻게 키우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은 라니가 건강하게만 자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에요“라고 말했다.
앞서 규진씨 부부는 지난해 12월 벨기에의 한 난임병원에서 정자를 기증받아 임신했다. 한국에서 시술을 받는 것도 고려했으나, 대한산부인과학회 윤리 지침상 법적·사실혼 부부에게만 정자 공여 시술을 하도록 법적으로 비혼 여성인 규진씨는 시술을 받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규진씨는 지난 6월 말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한국 병원에선 법적 부부나 사실혼 이성애 부부에게만 정자를 제공하기 때문에 저는 해당이 안 된다. 개인적으로 기증자를 찾더라도 정자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는 건 불법이다. 그럼 지인에게 부탁해야 하는데 그것마저 쉽지 않아서 포기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들은 현재 한국에서 법적으로 부부가 아니기에 ‘라니’는 한부모 가정에 편입된다. 세연씨는 배우자가 출산했지만 육아휴직을 쓸 수 없다. 훗날 양육권 등의 다툼이 생길 여지도 있다. 현재 국회에는 다양한 가족의 형태를 법적 테두리 안에 들여놓는 생활동반자관계법과 가족구성권 3법(비혼출산지원법, 생활동반자관계법, 혼인 평등법)이 발의돼 있으나,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생활동반자관계법은 시기상조”라며 사실상 반대 의견을 내비쳤다.
장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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