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성민우회와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의전화 등 전국 208개 여성인권단체가 속한 ‘강간죄 개정을 위한 연대회의’ 회원들이 2019년 9월18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국회 앞에서 강간죄 구성요건 개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들은 강간죄 구성요건을 ‘폭행·협박’에서 ‘동의’ 여부로 개정할 것을 요구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여성가족부가 성폭력 피해자 대다수는 폭행·협박이 없는 상태에서 피해를 더 많이 겪었다는 공식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러한 내용은 지난 2월 <한겨레>가 보도한
실태조사 초안과 일치하지만, 초안과 달리 이번 발표에선 ‘강간죄 개정’이라는 표현이 삭제됐다. 여가부가 해당 표현을 의도적으로 지운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여가부는 21일 ‘2022 성폭력 안전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조사 결과를 보면, 성추행 피해를 겪은 상황을 복수 응답으로 물었을 때 피해 당시 폭행이나 협박이 있었다고 답한 여성 응답자 비율은 각각 2.7%, 7.1%로 집계됐다. 이 둘을 합쳐도 10%가 안 되는 셈이다. 주된 성추행 피해 유형은 ‘가해자의 속임수’(34.9%), ‘폭행·협박 없이 갑작스럽게 당함’(26.6%), ‘가해자의 강요’(18.7%) 등이었다.
강간 피해도 같은 양상으로 나타났다. ‘가해자의 강요’(41.1%), ‘속임수’(34.3%)에 의한 강간이 ‘협박’(30.1%), ‘폭행’(23.0%)에 의한 강간보다 높았다. 성폭력 안전실태조사는 성폭력 실태를 파악하고 정책을 수립하기 위해 ‘성폭력 방지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3년마다 실시하고 있다. 이번 조사는 지난해 8~10월 전국 19살 이상 64살 이하 1만20명을 대상으로 진행됐다.
폭행·협박이 수반되지 않는 성폭력이 더 많다는 정부 차원의 실태조사 결과가 나왔음에도, 여성 폭력 방지 정책 주무부처인 여가부는 ‘강간죄 개정’ 표현을 삭제하는 데 급급한 모양새다. 여가부는 이번 보고서에서 폭행·협박이 없는 성폭력이 많다는 점을 언급하며 “폭행·협박이 없는 상황에서 발생하는 피해를 성폭력 범죄로 포괄하는 방안을 검토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연구진의 제언을 담았다. 하지만 <한겨레>가 입수한 보고서 초안을 보면, 연구진은 “폭행·협박을 전제하고 있는 강간죄 구성요건 변경을 보다 적극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며 강간죄 개정 검토 필요성을 언급한 바 있다. 여가부가 보고서에 비슷한 내용의 제언을 담으면서 굳이 ‘강간죄 개정’이라는 표현을 지운 것이다.
이에 대해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장은 “유엔에서도 2018년 3월 형법을 개정해 동의 여부를 중심으로 강간을 정의할 것을 한국 정부에 권고한 상태”라며 “왜 굳이 ‘강간죄 개정’이라는 말을 빼고 감추려고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여가부는 지난 1월 강간죄의 구성요건을 현행 ‘폭행·협박’에서 ‘동의 여부’로 바꾸는 것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가 법무부의 반대로 철회한 바 있다.
여가부는 강간죄 개정 표현이 삭제된 이유에 대해 “폭행·협박 없는 성폭력 피해에 대한 연구 등 대응이 필요하다는 취지는 변함이 없다”고 해명했다.
오세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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