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권리보장 네트워크’ 주최로 9일 오후 서울 용산역 광장에서 열린 집회에서 참석자들이 “국가는 임신중지를 권강권으로 보장하라!”고 적힌 손팻말을 들어보이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국가는 모두에게 안전한 임신중지 방안을 마련하라!”
9일 오후, 서울 용산역 1번 출구 앞 광장에 ‘보라색’과 ‘검은색’ 옷차림을 한 여성 100여명이 구호를 외쳤다. 보라는 성평등을, 검정은 ‘낙태죄 폐지’의 불씨를 댕긴 2016년 10월 ‘검은 시위’를 상징하는 색이다. 당시 여성들은 ‘모자보건법’이 정한 허용범위(①본인·배우자가 유전학적 장애가 있는 경우 ②본인·배우자가 전염성 질환이 있는 경우 ③강간에 의해 임신된 경우 ④혈족·인척 간 임신된 경우 ⑤본인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치는 경우)에 해당하지 않는 임신중지 시술을 시행한 의사의 자격정지 기간을 12개월로 확대’하는 정부 정책에 항의해 검은 옷을 입고 거리로 몰려나왔다. ‘내 자궁의 주인은 나’라며 ‘임신중지 합법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이어지길 2년여, 2019년 4월11일 드디어 헌법재판소가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며 이른바 ‘낙태죄’(형법 제269조 1항, 제270조 1항)는 66년 만에 효력을 잃게 됐다.
그로부터 4년이 흐른 지금, 또다시 거리에 나온 여성들은 “헌재가 기본권으로 인정한 임신중지권을 지금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며 분노했다. 임신중지 허용범위를 제한한 모자보건법 개정안 등은 여전히 국회 상임위원회에 묶여 있고, 법 개정이 이뤄지지 않아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정부가 여성의 건강권 보장을 위한 후속 조치 마련에 손을 놓고 있는 현실을 비판한 것이다.
안전하게 임신중지 시술을 받을 수 있는 병원은 어디인지, 비용은 얼마나 되는지, 시민들은 의논할 곳을 찾지 못해 인터넷 사이트를 헤매며 ‘각자도생’하고 있다. 정부와 국회의 방치 속에 3만2천명(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2020년 추정치)이 자신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안전하게 행사하지 못한 것이다.
‘낙태죄’ 헌법불합치 4년…여전히 여성들은 위험에
최희수(가명)씨는 2021년 6월 ‘원치 않는 임신’을 했다. 헌재가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던 터라, 임신중지가 더는 범죄가 되지 않는다고 들었다. 하지만 보건복지부나 국민건강보험 등의 정부 누리집에서조차 임신중지 시술이 가능한 병원을 찾기 어려웠다. 결국 “임신중지를 한 당사자들을 통해 건너건너 정보를 수집해야” 했다.
알음알음 찾아간 산부인과 병원에선 ‘불편한 시선’을 마주해야 했다. 의사는 곤란한 표정으로 “원래는 안 되는데…”라고 운을 떼기 일쑤였다. “시술을 꼭 받아야겠다면 50만원 이상의 비용이 든다”고 말하는 곳도 있었다. 더 이상 불법이 아니라는데, 최씨는 의료진이 자신을 죄지은 사람처럼 보는 듯했다.
국외 단체를 통해 ‘임신 10주 이내에 복용하면 임신중지를 유도’한다는 ‘미프진’(미프지미소)이란 유산유도제를 구매할 수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최씨는 당시 임신 5~6주차였다. 약이 배송되려면 2~3주가 걸린다고 했다. 자칫 오배송이라도 되면, 제때 복용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결국 건너건너 알게 된 사람을 통해 ‘중국산 미프진’을 구입했다. 정품 미프진과는 사용법과 복용량이 달랐다. 중국어로 쓰인 설명서를 번역해 가며 불안한 마음으로 약을 복용했다. 반나절 동안 구토와 복통에 시달렸다. 2~3주면 멎어야 할 출혈이 한달 넘게 지속된 끝에 결국 임신중지가 됐다.
지난 1월 임신중지 시술을 받은 김영서(가명)씨도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병원을 찾았다. 산부인과 병원 누리집을 들여다보았지만, 병원마다 하는 말이 전부 제각각이었다. ‘낙태죄가 폐지돼서 여성이 단독으로 수술을 결정할 권한이 있다’고 하는 곳이 있는가 하면, 여전히 ‘모자보건법이 정한 허용범위까지만 가능하다’거나 아예 ‘시술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안내하는 곳도 있었다. 결국 김씨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시술 가능한 병원은 물론, 몇주차까지 시술이 가능한지 정보를 얻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잘못된 정보’를 얻었다가 ‘큰일’을 당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박수영(가명)씨는 지난해 1월 인터넷 검색을 통해 알게된 미프진 판매자로부터 임신 8개월까지도 효과가 있다는 말을 듣고, 180만원가량을 주고 약을 구매해 복용했다. 하지만 박씨는 며칠 뒤 화장실에서 아이를 출산했다. 뒤늦게 아이를 데리고 응급실에 갔지만 이미 아이의 숨은 끊어진 상태였다. 박씨는 영아살해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임신중지를 결정한 여성들이 이처럼 여전히 어려움을 겪고 있는 건, 헌재의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에도 국회와 정부가 후속 입법에 손을 놓고 있는 탓이다. 헌재 결정 직후인 2020년, 임신중지에 대한 ‘처벌’ 조항을 다룬 형법 개정안(6건)과 임신중지 허용범위 삭제 등이 담긴 모자보건법(8건)이 우후죽순 발의됐지만,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묶여 3년 가까이 논의에 진척이 없다.
복지부 쪽에선 “현실적으로 법이 없는 상태에서 정부가 정책적인 지원을 하기에는 제약이 많다”며, 여성의 건강권 보장을 위한 후속 조치 마련에 소극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현재 복지부는 ‘러브플랜’이란 누리집을 통해 임신중지 정보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누리집에는 임신중지 수술법과 후유증 등 기본적인 의학 정보만이 제공되고 있었다. 러브플랜에는 인구보건복지협회 안내 전화번호(1644-7373)가 게재돼 있으나, <한겨레> 취재진이 ‘임신중지를 위해 미리 알아야 할 정보’를 요청하자 “모자보건법이 개정되지 않아 제공할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이미 해외 사이트를 통해 유산유도제 미프진(미프지미소) 등의 판매가 암암리에 이뤄지고 있지만, 정부는 이 약품의 정식 판매 여부 결정도 미루고 있다. 현대약품은 2021년 7월 미프지미소정에 대해 수입의약품 품목허가를 신청했지만, 식품의약품안전처가 두차례 자료 보완 요구를 하자 결국 지난해 12월 신청을 자진 철회했다. 복지부가 최근 권인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를 보면, 복지부가 식약처와 여성가족부 등 타 부처와 유산유도제와 관련해 논의를 진행한 건 2020년 10월이 마지막이다.
정부는 그나마 안전하게 미프진을 구입할 수 있던 경로조차 막고 있다. 캐나다의 비영리 법인 ‘위민온웹국제재단’은 누리집 ‘위민온웹’을 통해 임신중지에 관한 정보와 함께 유산유도제를 우편으로 제공하고 있는데,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2021년 12월13일 위민온웹 사이트의 국내 접속을 차단했다. 오픈넷 등 시민사회단체는 지난해 3월11일 방심위가 내린 차단 결정을 취소해달라고 서울행정법원에 행정소송을 제기해 소송이 진행 중이다.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권리보장 네트워크’ 주최로 9일 오후 서울 용산역 광장에서 열린 집회에서 참석자들이 ‘임신중지 정보 제공’과 ‘유산유도제 도입’ 등 정부에 ‘낙태죄’ 폐지에 따른 후속 조처 마련을 촉구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시술 따른 ‘처벌’ 안받지만…규정 모호해 의료진도 난감
대체입법 공백 속에 임신중지를 원하는 환자들을 맞이하는 의료진들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이혜연 삼성봄그린산부인과의원 원장은 “‘임신중지 시술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문제가 생기면 네(의사)가 책임져’ 이게 지금 산부인과 의사들이 처한 현실”이라고 표현했다. 헌재의 결정으로 의료인이 임신중지 시술을 하더라도 처벌받지 않게 됐지만, 임신중지 시술 허용 범위를 ‘강간에 의한 임신’ 등 5가지로 규정한 모자보건법이 남아 있는데다, 임신중지 시술 시기 등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없어 시술에 따른 부담이 오롯이 의사 개인에게 쏠리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김희선 동국대 일산병원 교수도 “모자보건법이 허용한 범위 외의 사례도 임신중지 시술이 가능한 것인지 현재로선 모호한 상태”라며 “시술을 했을 때 환자에게 과다출혈, 패혈증 등의 합병증이 발생할 경우 법적인 책임 소재도 명확하지 않다”고 말했다.
정부가 손놓고 있는 사이, 임신중지 시술은 ‘시장의 논리’로 흘러가고 있다. 현재 임신중지 시술은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비급여’ 의료행위다. 그 결과 병원마다 시술비는 천차만별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지난해 6월 발표한 ‘2021년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임신중지 시술을 한 여성 592명 중 36.2%가 시술비로 30만~50만원을 지불했다. 50만~70만원을 낸 비율도 15.4%에 달했다. 임신중지 시술을 하는 산부인과 병원들이 누리집을 통해 비용을 공개하고 있지만, 상담 과정에서 비용이 크게 달라지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이혜연 원장은 “임신중지 시술비 산정 방식이 임신 주수와 병원의 인력 및 장비, 시설 규모 등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어떤 일정한) 기준을 만들기 위한 공적 논의가 부재한 상황은 문제”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미 낙태죄가 실효성을 상실한 만큼, 정부가 서둘러 여성들의 건강권 보장을 위한 후속 정책 마련에 나서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나영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대표는 “입법 공백을 핑계 댈 게 아니라,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임신중지를 건강보험으로 보장하고, 유산유도제 도입을 제도화해 여성들이 경제적 부담 없이 안전한 환경에서 임신중지 시술을 받을 수 있도록 정책 마련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아울러 임신중단이 가능한 필수의료시설이나 피임 관련 전문의료시설, 미성년자·성폭력 피해자 등 취약계층을 위한 공적지원시설에 대한 정보를 체계적으로 제공하는 것 등은 법 개정 이전에라도 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채윤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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