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왼쪽)이 지난해 5월26일 정부세종청사에서 국무회의에 앞서 열린 임명장 수여식에서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여성가족부가 2023년 새해를 앞둔 지난달 29일 ‘
여성폭력통계’를 발표했다. 382쪽 분량의 보고서 형태다. 함께 배포된 보도자료엔 통계를 구축한 법적 근거와 통계 목록, 그 구성과 구축 의의 등이 적혀 있었다. 정부가 2019년 12월 시행된 여성폭력방지기본법에 근거해 여성폭력통계를 발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러나 여가부가 발표한 방식을 보면 ‘첫 공표’라는 의미가 무색할 지경이다. 여가부 누리집에만 공개됐을 뿐, 설명을 위한 자리는 전혀 없었다.
여가부는 이번 통계를 두고, 여가부가 3년 단위로 실시하는 성폭력, 가정폭력, 성매매, 성희롱 등 개별 실태조사와 법무부, 대검찰청, 경찰청 등 각 정부부처가 관리하는 통계 등 수집 가능한 모든 통계를 일목요연하게 종합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기존 통계들의 단점은 명확하다. 실태조사는 민감한 문항에 대한 응답자의 솔직한 답을 얻기 어렵고, 조사 규모의 한계로 실제 피해 규모를 산출하는 일이 쉽지 않다. 또 경찰과 검찰 등 수사기관이 관리하는 범죄통계는 피해자 또는 제3자가 신고·고소·고발하거나 수사기관이 직접 인지한 여성폭력 범죄만 다룬다. 그렇지 않은 여성폭력 범죄는 현실에는 엄연히 존재하지만 통계에는 없는 일이 되고 마는 것이다.
152종의 자료를 한곳에 모았다고 해서 각 통계가 갖는 단점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여성폭력통계 구축 과정에서 발견된 부족한 부분이 무엇인지 밝히고,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를 함께 제시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는 “지금 공표된 통계는 단순 통계 집적(모아서 쌓는 것)에 불과하다”며 “통계를 구축하는 것은 문제의 실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경향성을 분석해서 정책 대안을 제시하기 위함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여성폭력통계는 성별을 기반으로 하는 여성폭력 실상을 파악하고 효과적인 재발 방지 및 피해자 보호·지원책을 마련하기 위한 기초 자료다. 통계를 통해 공표된 내용만으로도 여성폭력의 심각성을 확인할 수 있다. 여성 10명 중 4명 가까이(38.6%)가 평생 한 번 이상 성추행, 강간 등의 성폭력 피해를 경험했고(2019년 성폭력 안전실태조사), 여성폭력을 경험한 피해자 10명 중 5명 가까이(46.0%)가 과거 또는 현재의 배우자, 연인 등 친밀한 관계에 있는 가해자로부터 폭력 피해를 당했다(
2021년 여성폭력 실태조사).
그런데도 여가부는 이번 여성폭력통계에서 확인된 문제들을 개선하기 위한 대책을 전혀 제시하지 않았다. 최소한 개선 방향이라도 언급할 만 하지만, 이마저도 찾아볼 수 없다. 여성폭력 문제를 앞으로 어떻게 해결할지 등과 관련한 김현숙 여가부 장관의 말 한마디도 담기지 않았다. 그는 여성폭력 방지 정책 주무 부처의 수장이다. 지난해 9월 배포된 ‘통계로 보는 남녀의 삶’ 보도자료를 보면, 비록 만족스러운 수준은 아니지만 김 장관은 “이번 통계를 밑거름 삼아 우리 사회 남녀 현실을 잘 반영하는 정책과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세부 추진 과제를 마련해 나가겠다”라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이번 여성폭력통계 공표 과정에서는 이런 최소한의 의지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김 장관의 신년사도 마찬가지다. 3100자가 넘는 글자(띄어쓰기, 문장 부호 등 포함) 속에 ‘폭력 피해자 보호·지원을 강화하겠다’는 다짐은 있지만, 성차별에서 기인하는 폭력으로부터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여성의 권리를 보장하겠다는 의지를 확인할 순 없었다. 출범 후 8개월이 지난 윤석열 정부의 현주소다.
오세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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