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5일 ‘인하대 성폭행 사망 사건’이 발생한 지 한 달이 지났다. 가해자는 의식을 잃은 여성 동급생을 성폭행하고, 사망에 이르게 한 혐의(준강간 살인죄)로 기소돼 다음 달 첫 공판을 앞두고 있다. 가해자에게는 몸을 가누지 못하는 피해자를 부축해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폐회로티브이(CCTV)에 찍혀 준강간 혐의가 적용됐다. 준강간이란 피해자가 술이나 약물 등으로 인해 ‘심신상실이나 항거불능’인 상황에서 이뤄진 강간을 말한다. 폭행이나 협박에 의한 강제적 성관계를 처벌하는 ‘강간죄’와 구별된다.
그러나 이 사건과 달리 ‘보통의 준강간’의 피해자가 법적 절차를 거쳐 그 피해를 인정받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 인하대 사건처럼 폐회로티브이에 피해자가 몸을 가누지 못하는 모습이 찍혀도 그렇다. 가해자가 “피해자가 술에 만취하기 전에 (성관계) 동의를 받았다”고 주장하고, 이를 법원이 인정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 16일 저녁 인하대 성폭행 사망 사건을 돌아보는 ‘젠더 갈라치기라는 새로운 함구령을 넘어’ 토론회에서는 피해자 지원단체 활동가가 실제 현장에서 준강간 사건은 어떻게 다뤄지는지 사례와 문제의식을 공유했다.
이날 ‘준강간, 누가 어떻게 허용하고 있는가’를 주제로 발표한 남성아 천주교성폭력상담소·준강간 사건의 정의로운 판결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활동가는 “피해자가 대로변에서 차 문이 열린 채 범행을 당한 것을 대질조사에서야 알게 된 경우, 가해자가 다음날 문자로 피해자에게 (범행을) 사과한 경우, 복수의 남성이 몸을 전혀 가누지 못하는 피해자를 숙박업소에 데려가는 모습이 폐회로티브이에 찍힌 경우에도 법원이 이를 ‘동의’를 한 성관계라고 판단하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피해자가 통제력을 상실한 상태에서 범행이 이뤄졌다는 사실을 뒷받침할 명확한 증거가 있는데도 법원이 이를 준강간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수사기관이나 법원에서 준강간 인정이 이처럼 쉽지 않은 이유는 법원의 ‘검증’이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를 향하는 그릇된 관행 때문이라고 남 활동가는 지적했다. 피해자가 피해 상황을 파편적으로라도 기억하면 ‘당시에 왜 저항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이 날아들고, 피해자가 전혀 기억하지 못하면 가해자의 사실관계 왜곡, 선별적 상황 편집에 대응하기 어려워진다. 피해자가 딜레마 상황에 놓이는 것이다. 남 활동가는 “준강간죄가 피해자의 권리 보장이라는 입법 목적에 부합하게 작동하기 위해서는 가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엄격하게 판단해야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피해자에게 더 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했다. 이 과정에 수사기관이나 법원이 피해자에게 그 어떤 여지도 없이 성폭력 피해를 당할 만한 상황이었음을 입증하라고 요구한다는 점을 남 활동가는 지적했다. 그는 “피해자성에 대한 정형화된 기준과 낮은 인권감수성으로 피해자를 2차 가해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피해자가 의식 없는 채 했던 무의미한 혼잣말, 가해자와 단둘이 있는 공간에서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했던 말, 피해자의 사건 이후 ‘행적’ 등이 모두 가해자에게 유리하게 이용되고 있다고 그는 덧붙였다.
2019년 3월2일 오후 서울 종로구 지하철 4호선 혜화역 앞에서 ‘남성약물카르텔 규탄집회’가 열려 참가자들이 ‘남성약물강간 카르텔의 패배’등이 적힌 손팻말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실제 준강간 사건 가해자가 유죄판결을 받는 비율은 높지 않다. 2019년 전국성폭력상담소가 지원한 준강간 사례를 보면, 가해자를 고소·신고한 피해자 511명 가운데 가해자가 기소된 피해자는 229명(44.8%), 가해자에게 유죄가 선고된 피해자는 112명(21%)이었다. 5명이 준강간 피해를 신고하면, 1명만 인정되는 셈이다. 피해자 지원 활동가들 사이에서 “강간보다 준강간으로 인정받는 게 더 어렵다”는 성토가 나오는 이유다. 무죄 선고된 이유로는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의 상태로 보기 힘듦(29%) △가해자의 범죄 고의성이 합리적 의심 없이 증명되지 않음(24%) △피해자 진술 신빙성 낮음(20%) 등이 있었다.
18일 <한겨레>가 법원 판결문 열람시스템에서 살펴본 몇몇 사건의 판결문에서도 ‘준강간’과 그 피해자에 대한 몰이해가 드러난다. ‘가해자가 범행 다음 날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하는 메시지를 보냈지만 이는 문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행동으로 볼 여지도 있다’(대학 선후배 사이였던 가해자가 술에 취한 피해자를 간음해 기소된 사건에서), ‘피고인이 사건 당일 불상의 방법으로 피해자를 항거불능 상태에 이르도록 한 것은 아닌지 의심이 가는 사정이 존재하나, 충분히 증명되지 않았다(가해자가 피해자의 음료에 졸피뎀을 타 정신을 잃게 한 다음 간음해 기소된 사건)’ 등의 이유로 재판부는 무죄를 선고했다. 2020년 서울고등법원 제9형사부는 가해자와 그 일행 3명이 만취한 피해자를 차에 태워 도시 외곽으로 데려가고, 몸을 가누지 못하는 피해자를 모텔로 끌고 가는 장면이 폐회로티브이에 찍혔는데도 “피해자의 심신상실이 인정되나, 가해자의 고의가 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며 무죄 판결한 원심을 확정하기도 했다. 당시 재판부는 ‘모텔에 가기 전에 (피해자가) 성관계에 동의했다’는 가해자의 말을 받아들였고, 그 후로 ‘사전 동의’ 변론은 성범죄 가해자 조력 변호사들 사이 하나의 ‘전략’이 되었다고 한다.
“술·약물 동반 성폭력 피해, 전체 상담 5분의 1”
한국성폭력상담소의 ‘2020년 상담통계 및 상담동향 분석’을 보면, 술과 약물을 동반한 성폭력 피해는 전체 상담의 5분의 1(18.6%)에 이른다. 지난해 10월 관세청이 장혜영 정의당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를 보면, 대표적인 성범죄 약물인 지에이치비(GHB‧감마하이드록시낙산) 적발은 2020년 469g에서 지난해 1~8월 2만8800g으로,
1년도 안 돼 61배가 늘었다. 준강간 수사·재판 관행이 달라지지 않으면 피해자 계속 양산될 수밖에 없다. 남 활동가는 “이토록 협소한 ‘준강간’의 기준을 입법 취지에 맞게 확장하기 위해서는 강간죄 개정이 필요하다”며 “성폭력의 판단 기준이 ‘동의 여부’로 바뀌면, 술이나 약물로 인해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하지 못한 준강간 사건에 대한 판단 기준도 바뀔 것”이라고 했다.
최윤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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