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퀴어 퍼레이드에서 ‘퀴어동네’ 소속 최유정 노무사가 손팻말을 들고 있다. 퀴어동네 제공
일상의 혐오와 차별을 피하기 위해, 성소수자는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곤 한다. 동료들이 ‘남자친구 있어요?’, ‘여자친구 있어요?’라고 묻는 말에도 버거움을 느낄 때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의 성별을 바꿔 얘기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성소수자라는 사실이 직장에 알려져 일자리를 잃을 수 있다는 불안감도 이들을 힘들게 하는 요인이다.
“커밍아웃하지 못하는 직장 분위기, 그 자체가 차별입니다.” 지난 19일 서울 마포구 민주노총 서울본부 회의실에서 만난 여수진 노무사가 말했다. 김시운 노무사도 “성소수자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 차별받는 경우도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
성소수자가 아닌 척’ 해야 하는 삶, 그 자체도 차별”이라고 했다. 이들은 노무사모임인 ‘노동자의 벗’에서 만난 노무사들과 함께 지난 5일 퀴어노동법률지원네트워크 ‘퀴어동네’를 만들었다. 소속 노무사는 모두 8명. 성소수자의 노동권을 단일 과제로 하는 단체는 퀴어동네가 처음이다.
이들 노무사는 올해 상반기 동안 여러 회사의 취업규칙과 내규를 뜯어보는 과정에서 노무사 네트워크의 필요성을 느끼게 됐다고 한다. 애초 성소수자 노동자를 지원하기 위해 일회성으로 시작한 일이었는데, 장기적 관점에서 이들을 도울 수 있는 조직이 필요하다는 점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돌이켜보니, 여러 차별을 겪고 있는 성소수자 노동자가 안전하게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을 노무 상담 공간은 거의 없었다. 여 노무사는 “노동은 삶과 밀착돼 있기 때문에 노동의 영역에서 불이익을 받는다면 삶의 근간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고 단체 설립 취지를 밝혔다.
퀴어동네는 지난 16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23회 서울퀴어퍼레이드를 통해 존재를 알렸다. 광장에 부스를 차리고 ‘나는 퀴어 친화적인 직장을 원하는 ○○○입니다’라고 적힌 손팻말을 참가자들에게 나눠줬다. 현장에서 성소수자를 대상으로 노동 상담도 했다. 한 성소수자는 직장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아웃팅’(타인이 성정체성을 강제로 공개하는 것)하고 있다며 고충을 호소했다. 그는 계약직 노동자인데 그 일이 자신의 계약 갱신에 영향을 미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고 한다. 여 노무사는 “지금 당장 기댈 수 있는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에는 성소수자 괴롭힘에 대한 구체적 내용이 없다”며 “우리는 이런 사례 등과 관련해 사내 문화를 어떻게 만들어가야 할지 회사들과 함께 고민하는 역할을 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면서 일본의 게임 기업 닌텐도 사례를 들었다. 닌텐도는 지난해 3월부터 혼인 관계에 상당하는 동성 파트너가 있는 사원에게 기혼자 혜택을 그대로 지원한다. 사내 괴롭힘에 관한 규정도 바꿨다. 성적 지향·성별 정체성에 관한 차별적인 발언이나, ‘아웃팅’ 행위도 명확하게 금지했다. 노무사들은 “성소수자를 인정하는 것이 기업의 생산성 향상에도 도움이 된다”고 강조했다. 앞서 리 배지트 미국 매사추세츠 주립대학교 교수(경제학)도 동성결혼 법제화가 기업 활동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밝힌 바 있다.
노무사들은 정부의 역할도 강조했다. 일본은 2019년 노동시책종합추진법을 개정하면서 ‘소지하라’를 포함한 직장 내 괴롭힘 금지를 법제화했다. ‘소지하라(SOGI+hara)’란 성적 지향(Sexual Orientation)과 성별 정체성(Gender Identity)의 약자인 소지(SOGI)에 괴롭힘을 뜻하는 허래스먼트(harassment)의 앞머리 ‘하라’(hara)를 붙인 합성어다. 2020년 4월 여성경제연구 제17집 제1호에 실린 ‘노동시책종합추진법 개정으로 본 일본의 직장 내 괴롭힘의 규제방향’을 보면, 일본은 성소수자를 모욕하거나 아웃팅하는 행위를 직장 내 괴롭힘으로 판단하고 있다. 특히 성소수자에 대한 프라이버시 침해의 구체적인 사례로는 사람들 앞에서 애인의 유무를 묻거나, 과도하게 결혼을 추천하는 사례 등을 들었다. 여 노무사는 “한국의 고용노동부에 해당하는 일본 후생노동성에서는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가이드라인을 통해 성소수자에 대한 괴롭힘, 이른바 ‘소지하라’를 금지하는 내용을 명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업과 정부가 나서 있는 일본과 달리 한국에서는 노조 차원의 움직임만 있다. 김수정 노무사는 “전국금속노동조합에서 만든 성소수자를 위한 단협안 내용을 국가가 법 개정을 통해 전체 일터에서 적용하도록 한다면 성소수자를 위한 노동 환경이 크게 바뀔 것”이라고 했다. 금속노조는 지난해 12월 성적 지향이나 성별 정체성을 이유로 노동자가 마땅히 누려야 할 보편적 권리에서 배제되거나 차별받지 않아야 함을 명시한
모범단체협약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 개정안에는 ‘배우자는 법률상 혼인 여부와 상관없이 사실혼 관계의 배우자 및 동거인을 포함하며, 가족은 법률상 혼인으로 성립된 가족 형태에 국한하지 않고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 등을 고려한 다양한 가족 형태를 포함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퀴어동네 소속 노무사들은 “더 많은 사례를 모아 ‘미세차별’에 대응할 수 있도록 성소수자들이 이곳 문을 두드려 달라”고 했다. 퀴어동네는 성소수자를 위한 △상담 △법률구제 △교육사업 등을 할 계획이다. 퀴어동네에 상담을 신청하고 싶다면 공식 이메일(QQdongne@gmail.com)을 보내면 된다. 관련 내용은 퀴어동네 트위터 계정(
@qqdongne)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주빈 기자
ye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