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은 선임이 내게 물어본 적이 있다. 시장실 업무 중에 무엇이 가장 힘드냐고. 나는 과일을 깎는 것이 너무 어렵고 자괴감을 느낀다고 했다. …21일 연속 도시락을 차린 적도 있다. 도대체 며칠 동안 이 사람들을 위해서 밥을 차려야 하는가. …가장 황당한 것 중에 하나는 시장님이 일회용품 사용하는 것을 싫어하셔서 눈 가리고 아웅 식으로 일회용기에 담긴 음식을 일반 식기에 옮겨 담아 차리는 일이다.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폭력 피해자
김잔디(가명)씨가 쓴 책 <나는 피해호소인이 아닙니다>에는 김씨가 ‘비서’라는 직함으로 일하며 도맡았던 각종 업무가 세세히 기록돼 있다. 서울시 공무원으로 한 산하기관에서 일하던 김씨는 2015년 “지원도 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서울시장 비서직 면접을 보러오라는 연락을 받고 비서실로 자리를 옮긴다.
‘일정관리’ 담당 비서였던 김씨의 업무는 공사를 수시로 넘나들었다. 2∼3달에 한 번씩 박 시장의 통풍약을 대리 처방받고, 명절에는 시장 가족이 먹을 불고기·김치 같은 음식을 챙겼으며, 때로 홀로 밥을 먹는 박 시장 맞은편에 앉아 ‘말동무’를 해야 했다고 그는 토로한다.
김씨 사례처럼 여성 공무원이 비서직으로 발령받아 공사 구분이 불명확한 업무를 전담하게 되는 일은 공직 사회에서 흔하다. 25일 여성가족부가 20개 지자체(광역 15개, 기초 5개)를 대상으로 진행한 ‘2021 양성평등 조직문화 진단’ 결과를 보면, 일정관리·서무 비서의 87.4%(광역)는 여성이었다. 이들은 통상 일정 조율, 전화 응대, 사무실 내 각종 물품 관리 등을 맡는다. 반면 같은 비서직이라도 정무·수행 비서로 일하는 이의 88%(광역)는 남성이었다. 정무비서는 정책·정무적 조언을, 수행비서는 공식 일정에 동행한다. 보다 핵심에 가깝고, 공식적인 업무에 여성은 배제되고, 남성은 배치되는 경향성이 포착된 것이다. 연구책임자인 김원정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성역할에 대한 고정 관념이 업무 배치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된다”고 했다.
공직 사회 ‘성별 업무 분리’ 경향은 비서 직무 외 다른 영역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기획·예산·인사·감사 등 주요 부서의 남성 비율은 64.5%(광역)였다. 건설·토목 관련 부서는 전체 20개 지차체 중 19개 지자체에서 남성 비율이 60% 이상이었다. 반대로 여성·복지 관련 부서는 20개 중 16개 지자체에서 여성 비율이 60% 이상이었다. 성별 ‘업무 분리’뿐 아니라 ‘직급 분리’ 양상도 뚜렷했다. 15개 광역 단체 5급 이상 여성 관리자 비율은 평균 22%로, 여전히 30%를 밑돌았다.
여가부는 20개 기관 근무자 1만여 명을 대상으로 성평등 인식에 대한 조사도 진행했다. ‘승진은 성별과 관계없이 이루어진다’는 문항에 대한 동의 여부를 5점 척도(1점 전혀 그렇지 않다·5점 매우 그렇다)로 물었더니 남성은 평균 3.63점을, 여성은 2.96점을 줬다. ‘부서배치가 성별과 관계없이 이뤄진다’에 대한 답변도 남성은 3.46점, 여성은 2.95점이었다.
조직의 성희롱 대응체계를 얼마나 신뢰하는지에 대해서도 물었다. ‘피해자의 신변이 보호되고 비밀이 철저히 보장될 것이다’라는 문항에 남성은 3.23점을, 여성은 2.38점을 줬다. ‘성희롱 행위자에 대한 적절한 징계가 이뤄질 것’이라는 문항에 대한 답은 남성은 3.54점, 여성은 2.76점이었다. 여성은 2점 중반대로 조직의 성희롱 대응체계에 대한 신뢰도가 매우 낮았다.
눈에 띄는 부분은 성별 업무 분리 경향과 성평등 인식 사이 ‘상관관계’다. 분석 결과, 업무상 성별 분리 정도가 높은 기관에서는 성희롱 발생시 적극 대처(신고)하겠다는 답변이 낮은 경향을 보였다. 이에 대해 여가부는 “여성에게 고정된 성역할 수행을 요구하는 조직에서는 성희롱 피해에 대한 문제제기가 진지하게 수용되기 어려울 것으로 예측해 신고할 의향이 낮게 나온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최윤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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